▲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J가 정말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방송사 아카데미 수업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인연을 이어 서로 친구처럼 지냈던 J. 다들 그렇듯 사는 게 바쁘다보니 서로의 삶에서 조연급이던 처음의 배역은 엑스트라로 내려앉았다가 카메오가 되었다가... 그 조차도 끊어져 회상신(scene)에서나 가끔 만나던 차였다.

J는 큰 비밀을 털어놓듯 사실 몇 년 전에 이혼했노라고 했다.

‘아, 그래서 네가 그토록 열심히 물건을 팔았던 거구나...’

J는 잘 나가는 영업사원이다. 워낙 이직률이 높은 직종이라 성우 시험 준비를 포기하고 그쪽에서 일하려 한다고 했을 때, 잘해야 3년이겠지... 했는데 매년 우수사원에 선정되는 경지여서(판매 종목을 밝히지는 않겠다. 그 업계가 워낙 좁고 보수적이라며 J가 겁을 내서다) 대견해하고 있었다. 연기에도 재능이 넘쳤지만 사람 상대하는 세일즈에 더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 중이었는데 이혼 후의 절박한 경제 사정도 한 몫을 한 것 같았다.

“이호온?”

“네에 선생님.”

“음... 그래 잘 했다.”

무조건 내가 참으면 되지, 나 하나만 참으면 모든 게 좋은데 뭐,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J도 그런 유형의 사람인 걸 잘 아는 나는 자초지종을 묻기 전에 잘했다, 고 먼저 말했다. 바보같이 참고 참고 참다가 더는 어쩔 수 없어 결정한 일이었을 거다.

문제는 없어보였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니 당연히 수입도 좋았고... 아이들은 처음부터 엄마밖에 몰랐다. 천군만마 같은 친언니도 둘이나 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이상한 상대방과 그 가족들에게 휘둘릴 일이 없다.

그런데 J가 몸담은 업계의 보수성이 문제란다. 이혼녀에 대한 시각이 너무 안 좋아서 이혼 후 몇 년 째 유부녀 행세를 하고 있고 그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얘기.

“까짓 거 공개해. 너는 그 업계 몸담기 전엔 백수였어. 그런데 그동안 이렇게 많은 걸 이뤘잖아. 설사 그 조직에서 밀려난다 해도 맨땅에서 기적을 일군 너 자신은 사라지지 않아. 모든 걸 잃어도 자기 자신은 남는 거야. 너는 다시 새로운 곳에서 일어설 수 있어.”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걸 잃어도 (살아만 있다면) 나 자신은 남는다. 그 나를 믿고 J가 용기를 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J가 나를 찾아 온 이유를 알기에 더 그렇게 강하게 말했다.

언젠가 S가 그런 얘기를 했다.

“뜬금없이 갑자기 연락해오는 후배나 친구들은 영락없어. 이혼 상담하려는 거야.”

S는 그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했다는 것 외엔 아무 잘못 없이, 오로지 상대방의 유책 사유로만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한, 그래서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두 번 다 멋지게 일어난 '돌싱녀'였다. 이혼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그런 S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 했다. 어차피 할 이혼이라면 S처럼 그 과정이 심플하길, 그 이후의 새 삶도 S처럼 그럴싸하길 원하는 그들의 무의식이 자신을 찾게 만든다는 게 S의 주장이었다. 그 얘길 들었을 때, 연애 문제로 고민하던 내 10대와 20대 시절이 떠올랐었다.

어떤 친구는

‘야, 야. 또 그 얘기니? 지겹다 지겨워. 그 따위 남자 끝내버려.’라고 말하는데

또 다른 친구는

‘그렇구나... 아직 확실한 건 없잖아. 미련이 남지 않게 더 가보는 것도 방법이야.’라고 말한다.

나는 상황 따라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끝내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땐 전자에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일 땐 후자에게...

물론 그 순간엔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그 말을 해 줄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 십중팔구 그렇다.

좋은 상담자는 기본적으로 ‘그래, 그래’ 하며 맞장구쳐줄 줄 알아야 하지만 더 뛰어난 상담자는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말이 도덕적 하자 없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경우에 한해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누군가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J는 내 성격을 잘 안다. 까짓 거 다 밝혀, 라고 말할 걸 알고 왔을 것이다. 그러니 J의 마음은 이미 밝힐 작정을 하고 있는 거다. 약간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했을 뿐.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하는 룰은 아니지만

자기 보단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순한 마음씨의, 조금은 바보 같은 사람들에겐 늘 이렇게 덧붙인다.

너 자신이 행복해야해. 너 자신이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거야.”

J야.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너의 행복이란다. 언제나 너를 제일 먼저 생각해.

이.제.는.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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