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필자가 다니던 강원산업은 IMF 외환 위기를 맞아 2000년 4월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에 흡수합병됐다. 그러나 합병은 했지만 국내 철강 수요 침체와 중국산 철강재의 공습으로 회사는 적자를 겨우 면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철강 제품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른 양허관세율 적용을 받아 8%의 수입 관세율을 매년 2%씩 낮춰 2004년에는 무세(無稅)가 적용되게 됐다. 영업이익률이 8% 수준이었지만 지급이자율도 8%나 됐다. 그러니 8%의 수입 관세가 없어지면 회사는 생존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방법은 금융비용 절감을 위해 무차입 경영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2004년 전에 차입금을 다 상환할 수 있는 수익을 창출해야 했다.
2001년 기획본부장(한정건 전무) 주도로 ‘ATTACK21’이라는 경영혁신 운동을 추진했다. 회사 최고 엘리트 15명과 컨설팅사 앤플랫폼(nPLATFORM)이 TFT를 구성하고 6개월에 걸쳐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생사를 걸고 전략 실행에 전력 투구했다. 성과는 대성공이었다. 경상이익률이 혁신운동 전인 2000년 0.4%에서 2001년 1.5%, 2002년 5.6%, 2003년 8.6%, 2004년 13.5%로 급증했다. 한보철강을 인수해서 그 자리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자신감은 여기서 시작됐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피합병회사 출신임에도 ‘TFT 간사’를 맡아 혁신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은 직장생활 내내 자긍심을 줬다.
ATTACK21 전략 실행 과제의 하나로 수입품 대응 전략이 있었다. 전략을 수립하면서 철강업계 생존을 위해서는 대외(중국)환경 영향에 대응한 국내시장 보호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한국철강협회(협회)와 접촉했으나 전기로 철강사에 대해서는 협회의 서비스가 미온적이었다. 1975년에 설립된 협회는 철강회사들이 회원사로 가입했지만 현실은 거의 P사 계열사처럼 움직였다. 회비 부담도 제일 많았고 직원도 P사로 입사 후 협회로 전환 배치된 경우도 있었다. 협회 존재 목적은 회원사의 이익을 위함이지만 국내 유일의 고로 철강사인 P사와 전기로 철강사 등 다른 회원사와 이해관계가 다를 때는 P사 입장을 지지했다. 대표적인 게 수입 철강 제품에 대한 대응이었다. 2024년 현재와 달리 2000년 당시 P사는 수출 시장 환경이 중요했지 수입품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전기로 철강사는 수입품 대응이 절실했다.
우리나라 경제 설계자들은 일찍이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해 1968년 P사를 창립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세금과 이자 감면, 정부보증, 전기요금 할인 등 정부의 가용예산을 끌어모아 ‘싹쓸이 지원’을 했다.(『코리안 미러클』 99쪽) P사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품질 좋은 철강재를 값싸게 공급해 줬다. P사 신화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 독점기업 P사의 논리가 철강산업의 논리가 됐다.
철강회사에 ‘고객’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2010년 현대제철 당진제철소가 가동되면서부터다. 그전에는 ‘수요가’란 용어가 통용됐다. 그만큼 P사의 철강재 공급(배분)에 목말라하다 보니 업계의 통용되는 호칭이 고객이 아니라 수요가였다. 이렇다 보니 치열한 경쟁을 통한 산업의 가치사슬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업에 종속되는 충성스러운 협력사만 존재하게 됐다. 경쟁적 가치사슬이 없다는 것은 평소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상황변화가 오면 대처를 못하게 된다. 고철을 녹여 철근 등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전기로 철강사 7개 사는 고로 철강사와 가치사슬이 다르다.
이에 전기로 철강사들은 협회의 미온적 지원에 대응한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다. 현대제철이 가장 큰 전기로 철강사인 관계로 필자가 기획안을 만들었다. 7대 전기로 철강사 기획부장들과 협의를 통해 협회 내에 ‘보통강전기로협의회(보전협)’를 설립했다. 전기로 철강사의 가치사슬에서 중요한 것은 원료인 고철과 전기요금이었다. P사는 주원료가 철광석과 석탄이고 전기는 자체 부생가스 발전으로 대부분을 충당하므로 고철과 전기요금이 중요하지 않았다. 2003년 6월 보전협을 설립하고 첫 사무총장으로 파견을 나가 전기요금과 고철 정책 관련 대정부 활동에 성과를 냈다. 경제단체와 연합해서 전기요금 인상을 저지시키고 고철 수출 승인 제도를 도입해서 국내 고철 시장을 안정화 시켰다.
그런데 고철 수출 승인제 도입을 계기로 협회의 임원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협회의 상근 부회장은 늘 산업부 퇴직 관료가 내려왔다. 그러나 협회 창립 이래 회장은 P사 회장이 겸직했고 상근 임원도 2인 모두 계속 P사 출신이 낙하산으로 내려왔다. 고철 수출 승인제 도입을 추진하자 협회 임원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P사 입장에선 수출에 제한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당시 P사 수출량은 매출액의 25% 정도였지만 수출은 시황에 따른 탄력적 판매 전략이 중요했다. 협의 끝에 고철은 P사에는 중요하지 않은 원료이므로 고철 수출 승인 제도를 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도입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 협회 상근 임원을 P사 낙하산으로 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2004년 3월 홍보팀장 임명으로 회사에 복귀했다가 10여 년이 더 지난 2016년 대외업무을 담당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추진했다. 먼저 국내 각 협회 사무국 임원 현황과 선임 방식을 조사했다. 그 결과 어느 한 협회도 한 회원사에서 설립 이래 회장과 상근 임원을 독차지하는 협회가 없었다. 모든 협회의 상근 임원은 사무국 직원 중에서 선임했다. 심지어 전경련이나 경총 같은 경우는 협회 사무국 출신이 부회장까지 승진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협회도 사무국 출신들이 임원으로 승진되도록 정관 개정을 추진했다.
연 1회 개최하는 협회 총회에서 논의한 결과 관련 컨설팅을 받아보고 정관 개정 여부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날 총회 논의에 대비해서 회사는 평소와 다르게 논리와 전투력을 겸비한 U사장을 참석시켰다. 이후 컨설팅 결과 해석과 총회 안건 상정 여부를 두고 필자는 P사 고위 임원과 두 차례에 걸친 ‘혈투’를 벌였다. 결과적으로 협회 두 임원 중 1인은 사무국 출신으로 하고 나머지 1인은 그 성과를 보고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필자가 이러한 일을 10년 이상에 걸쳐 끝까지 추진하고 관철시킨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어떤 조직이든 직원들에게 비전을 줘야 한다. 평생 근무를 해도 임원이 될 수 있는 기회 조차 없는 조직의 직원이 그 조직의 미션 수행에 헌신할 수 없다. 비전 없는 조직에서 일하는 것은 회원사에 대한 서비스 저하로 나타나고 그 피해도 회원사에 돌아간다. 조직은 ‘자기 진화가 잘 되는 조직이 최고의 조직’이고 경영자는 그렇게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둘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대내외 경영 여건에서 회원사를 대신해서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협회 임원은 엄정 중립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임원이 자기 뒷배를 의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선발 회사와는 이런 인연이 누적된 상황에서 홍보팀장이 됐다. 철강 업계에는 필자의 악명과 익명이 이미 널리 알려졌다. 홍보 오디세이 앞글에서 소개했듯이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매주 월요일이 특히 힘들었다. 출입기자나 이해관계자들이 선발 회사 임직원들과 주말에 골프를 치면서 취득한 정보로 다양한 취재가 들어오고 증권시장으로 루머가 들어가는 게 루틴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선발 회사를 자극시키면 안 된다면서 무대응 지침을 내렸다. 일관제철소 기사는 회장님에게 다 보고가 되므로 경영진은 수구적으로 대응했다.
홍보 업무의 어려움 중 하나가 예방을 잘한 홍보는 생색이 안 난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팀장은 담담하지만 팀원들의 의욕은 반감된다. 반면에 나쁜 기사 하나는 홍보팀에 엄청난 질책으로 돌아왔다. 선발 회사의 후발 회사 주저앉히기 홍보는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현대제철은 원료, 자금, 기술이 없다는 것이 주 메뉴였다. 그 중에서도 금융기관 쪽은 ‘기술’을 가장 큰 아킬레스건으로 봤다. 이에 대해 자금 담당 직원이 금융기관의 동향을 알려주면서 상의해 왔다.
회사의 무대응 지침이 있었지만 이제 홍보팀장으로서 승부를 걸어야 했다. 유력 언론사 출입기자와 오찬을 하면서 독일 TKS와 일본 JFE와의 교섭 사실을 알려줬다. 다음날 그 기자는 아주 세련된 그래픽과 함께 세계적인 두 회사가 현대제철을 두고 구애하는 기사를 크게 다뤄줬다(2007년 1월). 현대제철에 대한 시중의 우려를 ‘한 방’에 날리는 기사였다. 그렇지만 회사의 지침을 위반한 것이라 마음을 졸이면서 경영진의 반응을 기다렸다. 오전이 지나가도록 반응이 없었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이 시간까지 반응이 없다는 것은 회장실에서도 어떤 말씀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퇴근 무렵이 되자 그룹 내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왔다.
홍보맨 15년 역사상 수많은 기자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감사했다. 그중에서도 이 기사는 가장 보람을 느낀 기사였고, ‘홍보의 힘=언론의 힘’을 보여 주는 전형(典型)이었다. 이 기사를 계기로 필자의 홍보 활동이 회사(회장님)로부터 암묵적 인정을 받게 됐고, 그 이후 소신을 가지고 홍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경영진(회장님)도 홍보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알릴 것은 적극 알리자는 쪽으로 방향이 전환됐다. 이러한 분위기 반전을 계기로 회사는 선발 회사가 지속적으로 기자들에게 의문을 흘려 온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정면 돌파하게 됐다. 2007년 3월 경영진은 처음으로 기자단에게 회사의 일관제철소 준비 사항을 소상히 설명하는 기자간담회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방송을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 참석해 회사의 진정성을 평가해 줬다. 선발 회사는 더 이상 이런 문제로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렇게 선발 회사의 후발 회사 주저앉히기는 극복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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