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유머와 교훈이 녹아 있는 미국 대학의 졸업식 연설은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곤 한다. 세속적 성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으라거나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라는 이야기는 물론 하고 싶다고 누구나 던질 수는 없다. 미국의 졸업식 연설을 냉소하는 작가 데이브 브룩스는 <두 번째 산>에서 이러한 연설이 포장만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속이 빈 상자라고 썼다. 대학은 졸업생들에게 대담한 모험가가 되라고 요구하지만 우편물처럼 날아들 것은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인구학자 조영태는 한국의 젊은 세대가 가진 어려움을 ‘인구압박’으로 설명한다. 인구압박은 어떤 연령이 다른 연령 집단과 비교해 규모가 과도하게 작을 때 감당해야 할 압력으로 오늘날 한국 젊은 세대의 사회적 진도가 점점 늦춰지는 현상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다시 듣는 김광석의 ‘서른즈음에’가 어색하게 들린다면 오늘날 30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30대가 놓인 현실이 변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호주의 마이클 마못이 이끄는 연구팀이 수년간 대규모 조사와 임상 인터뷰를 통해 내린 결론도 젊은 세대가 놓인 현실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다. 이들은 더 중대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통념이 틀렸다고 말한다. 이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어렵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보다 재량권이 적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컸으며 우울증과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도 높았다. 같은 지위 안에서 보더라도 재량권이 적은 사람이 우울증과 정서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이는 최악의 스트레스는 무거운 책임감을 견디는 것보다 자존감을 파괴하는 수동적 일을 견디는 데서 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에서나 인생에서나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역경을 이기기 위해 분투하는 순간이 아니라 주도권과 의미를 상실한 채 모든 것이 반복되는 상황임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막막한 흰색으로 뒤덮인 한국 사회를 은유하기 위해 장강명이 2011년 쓴 소설 <표백>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에 대한 개인의 번뇌는 역사적으로 늘 있었다. 달라진 부분은 주도권이 다음 세대에게 잘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의 재생산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