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겐 헤리겔의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 [사진제공= 책짓는 아재]
오이겐 헤리겔의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 [사진제공= 책짓는 아재]

<마음을 쏘다, 활>을 다시 읽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헷갈린다. 여튼 다시 읽어도 역시 좋다.

독일의 선사 오이겐 헤리겔

저자 오이겐 헤리겔(1884-1955)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빈델반트와 리케르트에게 배우고 동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일하던 신칸트학파에 속한 연구자이다. 그러다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와서 1924년부터 1929년까지 객원교수로 머물면서 선을 배웠다. 결국 그는 신칸트학파를 떠나 독일의 신비주의와 선사상에 경도됐다. 그래서 “Der Zen-Weg”, 즉 <선의 도(道)>라는 제목의 책도 썼을 정도이다.

이 얇은 책은 저자 활쏘기를 통해 선을 배운 과정을 담은 책이다(애초에 저자가 궁도에 입문한 이유가 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오이겐 헤리겔은 독일의 선사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불교와 선사상을 공부한 독일인이 많아져서 자타가 공인하는 선사가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오이겐 헤리겔은 사실상 최초의 독일인 선사이다. 귀국 후에 일본 문화와 선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썼다. 심지어 죽고나서 기모노를 입은 채 안치됐다고 한다.

선과 궁도(弓道)

서문을 무려 스즈키 다이세쓰가 써줬다(서구에 선을 널리 보급시켰다). 다시 말해 이 얇은 책은 선을 다루는 책이라는 뜻이다. 원제가 “Zen in der Kunst des Bogenschiessens”, 즉 “활쏘기의 기예 안의 선”이다. 즉 원서는 명확하게 이 책이 선을 다루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오이겐 헤리겔은 선을 배우고자 궁도를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활쏘기와 선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스즈키의 설명을 들어보자.

“누가 진실로 활쏘기의 대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기술적인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술Technik’을 뛰어 넘어서, 그 기예가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라나는 ‘무능의 기예Nichtgekonnten Kunst’로 되어야 한다.”(7쪽) 활쏘기에 있어서 사수와 과녁을 서로 분리된 대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궁사는 자기 앞의 과녁을 맞히는 일 이외에는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는다.”(8쪽)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자기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끝없는 연습을 통해 기술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무의식의 상태는 궁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또 완벽한 기술적 숙련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도달할 수 있다.”(8쪽) 연습이 핵심이 아니라 기술적 숙련이 핵심이다. 기술을 완전히 익혀 더 이상 기술 사용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경지 속에서 자기를 잊어버릴 수 있고, 더는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이겐 헤리겔의 스승 아와 겐조는 활과 선을 다르게 보지 않았고, ‘대사도교’(大射道敎)를 만들었다. 당연히 아와 겐조의 입장은 일본 궁도를 대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접근이 이상하지 않다. 모든 일상이 선을 향한 길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나를 잊고 모든 것과 하나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는 김상봉 교수님이 <영성 없는 진보>에서 이야기한 영성(“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굳건한 믿음”)과 상통한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선은 자기 부인의 한 방편

<마음을 쏘다, 활>은 재밌다. 그리고 유익하다. 자기애가 폭증하는 우리 시대에 도움이 되는 자기 부인(self denial)의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이는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여러 신비주의자들의 교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얇은 소품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다. 날로 팽창하는 우리의 나르시시즘을, 조금의 고통과 손해도 못 견디는 우리의 자아를 말이다. 독일인 철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의 자아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하지만 선은 방법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지우고 난 후에 무엇으로 채울 지에 대한 통찰은 결여돼 있다. 그러니 일본 선사들이 군국주의에 동의한 것도 놀랍지 않다. 선과 민족주의가 결합돼서다. 또한 일본 무사들이 선과 검도를 결합해 탁월한 살인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목표가 어긋나 있다면 선을 통해 악마가 될 수 있다. 목표를 찾기 위해서는 위대한 종교와 고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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