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로 우리 사회가 다시 과거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돌고 있다. 낙관과 비관이 뒤섞인 이 같은 전망들을 짚어 보면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에 다시금 구성원 대다수의 공감 속에 어떤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는 요구가 내포된 것으로 읽힌다.
비상계엄은 한밤에 계엄군이 전격적으로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진입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보여줬다. 다만 비상계엄은 하룻밤 새 해제됐고 이후로는 사회 통념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난 18일까지는.
19일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는 과거의 일이 됐다고 믿었던 ‘정치 폭력’이 되살아났음을 세상에 알렸다. 진태원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연구교수의 표현처럼 “민주주의의 재난”이 닥쳤다.
몰려든 인파가 수사기관 차량을 에워싸고 거세게 뒤흔든다. 사람들이 기자에게서 카메라를 빼앗더니 이내 쓰러뜨리고 집단 구타한다. 경찰들을 몰아내고 법원 건물을 접수한 뒤 아수라장을 만든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 장면들이다.
조짐이 없지는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체포된 15일 오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은 윤석열 지지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일대는 곳곳에서 고성과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한 무리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중국인이라고 몰아세웠다. 무리 지어 행인들을 위협해도 누구 한 명 제지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기자가 경찰을 불러 그들을 빼낼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관저 인근으로의 진입을 통제하는 경찰에 다가가 갑작스레 손찌검부터 했다.
몇몇은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소속을 묻고는 했다. 기자 뒤에서 “사진 찍지 마. 빨갱이야”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윤 대통령 지지자들끼리도 서로 싸웠다.
지난해 12월 국회 앞에서 열린 대규모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는 외신들이 놀랄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치적 상대편에 대한 거대한 증오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비상계엄 사태 전부터 각종 사회적 갈등이 점차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당장 서슬 퍼런 공권력의 지엄함 앞에 폭력이 잦아들더라도 상당 기간 동안 응축된 그 증오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다. 그 증오가 남아있는 한, 언제든 윤 대통령의 말마따나 적대적인 상대를 “일거에 척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다.
30년 전, 고 홍세화 선생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톨레랑스’(tolerance)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톨레랑스를 “‘용인’(容忍)이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엥톨레랑스’(intolerance, 불용인)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톨레랑스’에 가까운가, 아니면 ‘엥톨레랑스’에 가까운가.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1987년 개헌처럼 거대한 사회적 약속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93.1%로 국민투표 사상 역대 최고 찬성률을 기록하며 만들어졌다.
마침 현행 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와 시대변화에 따라 개정을 요구받고 있다. 그렇다면 개헌 자체가 1987년처럼 오랜 사회적 갈등을 마무리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락을 여는 사회적 합의로 작용할 수 없을까.
장영수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본보와의 취재에서 “극심한 진영 갈등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면서 “국민적 합의 속에 개헌을 추진하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주권자로서 자각을 갖고 헌법처럼 중요한 문제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재난에 처한 민주주의를 스스로 구출해낼 저력이 있음을 증명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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