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지킨 시민들이 자리 잡은 안국역 6번 출구 ‘탄핵 찬성 집회’
“열심히 싸웠던 주권자 시민의 노력 덕분”... 탄핵 기쁨 나눠
“계엄 동조자 처벌, 제도 개선” 등 아직 남아있는 숙제 많아
【투데이신문 고해진 인턴기자】 오랜만에 탄 지하철 5호선 첫차. 열차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종로3가역에서 한 번에 내렸다. 내린 후 목적지 위치를 지도로 볼 필요가 없었다. 약속했다는 듯 어딘가로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니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고를 함께 보기 위해 시민들이 모였다. 안국역 6번 출구에는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전날 밤새우며 침낭 안에 누워있는 사람들, 텐트를 정리하는 사람들, 컵라면 갖고 가라고 외치는 천막 아래 사람들. 그중에서도 눈에 띈 건 개성이 담긴 깃발들이었다.
‘댕로에 살림 차린 연뮤회전러 협회’
이른 아침부터 혼자 앉아 좌우로 흔들고 있는 그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나누고자 다가가니 그는 선뜻 아스팔트 바닥에 깔고 있던 은박 담요의 왼쪽 자리를 기자에게 양보했다. 깃발이 뒤에서도 잘 보인다는 말에 그는 전날 새로 제작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바둑이(가명), 23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날 집회에 오전 6시 50분부터 나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사실 학교에 있어야 했다. 그는 교수에게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담은 이메일을 보냈고, 교수는 “몸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응원의 말과 함께 출석을 인정해줬다고 한다.
지금까지 탄핵 집회에 15회 이상 참여했다는 그는 “오늘은 반드시 내 눈으로 탄핵 심판 선고를 직접 보고 싶었다”며 “현장에 없으면 억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그간의 참여와 기다림에 대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깃발에 적힌 문구의 의미를 묻자 그는 “‘댕로’는 대학로, ‘연뮤’는 연극과 뮤지컬, ‘회전러’는 한 작품을 여러 차례 관람하는 관객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깃발의 디자인은 뮤지컬 관람 시 도장을 찍는 ‘도장판’을 모티브로 삼았다. 도장 7개 중 4개를 모으면 ‘민주주의 회복권 1매’를 증정한다. 이미 6개의 도장이 찍혔지만 정작 4번째 칸의 혜택은 아직 받지 못했다며,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연스럽게 굴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행동하고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거다.”
그는 성 소수자이자 불치병을 겪고 있어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탄핵 집회가 이어지자 광장에 나서는 이들을 보며 마음 한편에 부채감이 쌓였고, 어느 순간부터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돼 있었다. 집회에서 발언했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고 말했다.
계엄 이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데, 다수는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이가 현장에 나올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가 싸우고 있기에 나라가 유지된다는 점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SNS 활동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활용해 집회 현장을 공유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계속 보여주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탄핵 심판 선고까지 남은 시간은 약 20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한 일행과 다시 깃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일행은 주아(가명·20)로, 집회 참여를 계기로 알게 된 사이였다. “우리는 이긴다! 내란을 끝장내자!” 구호를 외치며 두 사람은 깃발을 더욱 힘차게 흔들었다. 선고까지 5분 남았을 때 그는 일행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서 헌법재판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말이 나오자,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을 나눴다.
그에게 오늘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는 “오늘 선고가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헌재 선고가 지연되면서 마음을 많이 졸였는데 이제는 후련하다”고 말했다. 이어 “동조자들도 처벌하고, 제도도 개선해야 할 게 많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일상으로 돌아가 취미를 즐기러 가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 나오는 “천박함에 반대하려면 필연적으로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라고 한다. 지금 서 있는 길이 어디에서 어디로 통하는 길인지 늘 생각하게 되는, 그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문장이라고. 이날을 기점으로 그는 더 많은 집회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퀴어 퍼레이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집회도 염두에 두고 있다.
“깃발이 저를 투쟁가로 만들었다. 이 깃발을 뽑지 않았다면 이 거리까지 나오지 않았을 거다. 앞으로도 옳다고 믿는 일,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거리로 나설 준비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