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기존 조선의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항의해 일으킨 군란이다. 조선 왕조의 개화 정책과 민씨 외척의 부패,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며, 결국 청(淸)과 일본의 개입으로 진압됐다. 이 사건은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해 청일전쟁의 시작점이 됐다.

그런데 이 사건을 위와 같이 정의하거나, 군대의 반란이나 쿠데타라는 뜻의 군란(軍亂)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사건의 일부에 초점을 맞춘 좁은 규정이다. 별기군과 기존 군대 사이의 차별 대우와 기존 군대의 군인에게 지급했어야 하는 급료가 밀린 것은 당시 실권을 잡으며 세도를 부리던 여흥 민씨(閔氏) 집안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시대 남성 정인(丁人)은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군대뿐만 아니라 당대 백성들 다수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기존 군대의 저항에 백성들이 동참하는 모습으로 사건이 전개됐다.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군란이 아닌 민란(民亂)이나 저항운동이었고 평가할 수 있다.

임오군란의 경과와 결과는 워낙에 유명하니 앞에서 언급한 개략적 정의로 대체하겠다. 대신 본 지면에서는 기존 군대와 백성들에게 척살의 대상이었던 왕후(王后) 민씨와 민씨 집안 세도가, 그리고 여기에 기생하던 관료들이 기존 군대와 백성들의 공격을 받은 뒤 보인 추접한 모습을 소개할 것이다.

당시 기존 군대는 오랫동안 별기군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고, 13개월 치 급료가 밀려있었다. 이후 겨우 지급되었던 1개월 치 급료로 지급되었던 쌀은 실제 지급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지급된 쌀도 썩거나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에 기존 군대는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해 해당 기관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왕후 민씨를 뒷배 삼아 세도를 부렸던 당시 군무사 경리당상이었던 민겸호(閔謙鎬)는 기존 군대의 항의를 누그러뜨리기는커녕 항의하던 기존 군대의 군인을 체포해 매질하고 투옥했다. 그리고 당시 급료가 밀렸고, 그나마 급료로 지급된 쌀이 양도 부족하고 상태도 좋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는 민겸호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결국 민겸호는 기존 군대의 주요 타도 대상이었다.

임오군란 당시 성난 군인과 백성들은 민겸호의 집을 점령했다. 민겸호는 군인과 백성들이 집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가족을 미리 피난시켰고 자신도 도피를 준비했다. 아울러 민겸호는 군란과 민란 세력의 진압을 준비했다. 그러나 다른 군인이나 관리들은 이미 민심을 잃은 민겸호를 돕지 않았고 오히려 변란 세력에게 더 협조적이었다. 이에 민겸호는 결국 도피했다.

민겸호는 도주를 위해 자신의 수염을 가리고 내시로 변장했다. 그러나 곧 기존 군대의 군인에게 발각돼 잡혔다. 죽임을 당하기 직전 민겸호는 군란과 민란 세력이 지지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빌었다고 전해진다. 과거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 집안의 권력 투쟁에서 민겸호 역시 민씨 집안의 일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실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 되자 민겸호가 과거 정적이었던 흥선대원군에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지만, 근대 이전 서로 맞서 싸우던 관계에서 패자의 수장이 패배의 책임을 지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였다. 그러나 민겸호의 태도는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후 민씨(훗날 명성황후) 역시 기존 군대와 백성들의 척살 대상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이후 일본과 강제로 체결한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열강의 조선 침략과 수탈이 시작됐고, 이것은 급격한 근대화와 함께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 상징 중 하나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었다. 당시 최대 세도가 집안이었던 민씨 집안은 백성들의 삶을 돌보기는커녕 각종 부정부패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정점에는 왕후 민씨가 있다고 판단했다.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세도가와 여기에 기생하는 관료들을 척살한 기존 군대와 백성들은 다음으로 왕후 민씨의 주살(誅殺)을 시도했다. 잘 알려진 대로 왕후 민씨는 기존 군대와 백성들의 공격을 피해 궁궐에서 탈출하기 위해 상궁으로 변장했다. 그러나 궁궐을 빠져나가던 중 기존 군대와 백성들과 마주했고, 이 과정에서 무예별감 홍계훈(洪啟薰)이 왕후 민씨를 상궁으로 봉직 중인 자신의 동생이라고 속여 왕후 민씨를 탈출시켰다. 그리고 왕후 민씨는 같은 집안 사람이었던 민응식(閔應植)이 감사로 있던 충주 장호원으로 탈출했다. 기존 군대와 백성에게 척살의 대상은 중전 민씨를 비롯한 민씨 세도가들과 여기에 기생하던 신료들이었지 상궁들이 아니었고, 그 덕분에 중전 민씨는 무사히 궁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홍계훈이 숨겨 준 왕후 민씨는 훗날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품계를 받았고,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죽임을 당할 때 역시 상궁으로 변장하고 상궁들 틈에 숨어있었다. 아울러 왕후 민씨를 상궁이라고 속여서 탈출을 도왔던 홍계훈 역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에 의해 사망했다. 을미사변이야 일본의 만행이 너무나 잔혹했고 을미사변을 일으킨 이유도 말이 되지 않지만, 임오군란 때 왕후 민씨의 행동은 조선의 중전다운 모습이 아닌,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타락한 지배층의 정점이었던 자의 비겁한 모습이었다.

최근 내란 혐의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윤석열과 김건희가 동시에 구속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이야 애초에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상황이지만, 김건희가 구속된다면 전직 대통령 부부가 모두 구속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한다.

윤석열은 대통령 후보 시절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서 “혼밥하지 않겠다. 국민 앞에 숨지 않겠다. 잘했든 잘못했든 국민 앞에 나서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윤석열은 구치소의 독방에서 혼밥 중이다. 이건 죗값을 치르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고, 그 밥조차 아깝다. 윤석열은 탄핵 당시 체포영장 집행 때도 이에 불응하기 위해 대통령 경호실에 속해 있던 군인들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있다. 또한 구치소에서 특검이 체포영장의 집행을 시도했을 때 수의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난동을 부리거나,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버티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체포영장을 집행하던 공무원들에게 “이거 다 불법행위니까 가담하면 안 된다”라고 얘기했다는 전언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전직 검사·검찰총장·대통령에게 기대하는 품위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다.

김건희도 비슷했다. 탄핵 심판 당시 체포영장이 집행될 때 “경호원이 쏘지도 않을 거면 총은 왜 들고 다니냐”고 했다는 전언도 있다. 또한 특검이 수사를 시작하자 지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더니 약 11일 만에 휠체어를 타고 퇴원했다. 그런데 김건희의 자택에서 멀쩡히 걷고, 소파에 앉아서 과일을 먹는 장면이 언론사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에 김건희는 구속을 피하려고 꾀병을 부렸다는 의혹을 받았다. 아울러 특검의 소환조사 요청에 대해서도 각종 조건과 핑계를 들이댔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걸면서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지키려고 했던 누군가를 위대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임오군란에서 왕후 민씨와 민씨 집안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윤석열과 김건희는 아직 그들의 죄의 유무를 수사받고 있을 뿐, 당장 사형이 내려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윤석열과 김건희는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졌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품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능력은 없고 탐욕만 있는 지배층이 명예나 품위가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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