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 속에서 인간관계는 한편으로는 기쁨의 원천이 되지만, 동시에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갈등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때로는 원망으로까지 번지는 감정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지혜가 오래전부터 종교와 속담이라는 두 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져 왔다는 점이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우리 속담은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종교적 계율과 생활 속 정서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두 표현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 마음의 본질과 관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에 대해 놀라울 만큼 닮은 통찰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겉으로는 단순한 도덕률처럼 들리지만, 사실 인간관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매우 현실적인 지혜이기도 하다.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기 시작하면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관계는 결국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그러나 미움을 받는 순간, 그것을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돌려보내기로 선택하면 그때부터 관계의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율은 단지 고상한 윤리 명제가 아니라, 적대의 감정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자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는 강력한 심리적 방어 장치이기도 하다. 미움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결국 나 자신도 그 미움의 무게만큼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이 가르침은 타인을 위한 희생을 넘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랑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속담은 훨씬 더 생활의 언어에 가깝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느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식이 미우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얼핏 모순처럼 들리지만, 부모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누군가 미우면 자연스레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 감정의 흐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운 마음이 올라오는 이유는 대개 그만큼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만큼 커지고, 상처도 쉽게 생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미운 자식’은 사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부모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떡 하나를 더 얹어 준다. 여기서 떡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관심’, ‘시간’, ‘위로’, ‘포용’,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상징하는 은유다. 이 속담은 타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미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성경의 계율과 우리 속담의 정서를 나란히 두고 보면, 곧바로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가 드러난다. 미움은 미움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관계의 골을 메우는 것은 결국 다시 내미는 사랑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선택할 것인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적 가르침과 생활 속 지혜는 하나의 언어로 만난다.
사람은 애초에 완전할 수 없고, 때로는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을 전제하고 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하나의 지혜로운 기술로 읽을 수 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 역시 상대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내가 먼저 따뜻함을 내어놓는 선택을 통해 성장과 화해의 가능성을 여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미움을 느끼는 대상은 원수일 수도, 직장 동료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상대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선택하느냐다. 미움이 올라오는 순간 사람은 흔히 서둘러 합리화를 시작한다. “저 사람 때문에…”, “저 행동을 어떻게 용서하나….” 하지만 그때 내가 붙잡은 감정이 결국 내 삶의 표정과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성경은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 속담은 들려준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
가리키는 대상은 다르지만, 두 가르침이 품은 메시지는 같다. 사랑이야말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빚어가는 힘이다. 관계를 치유하는 열쇠는 결국 내 마음의 태도에 있으며, 그 태도가 나를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를 더 건네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만 놓고 보면 오히려 가장 하기 어려운 선택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랑을 택하는 사람은 결코 약한 이가 아니다. 사랑을 내어놓을 힘과 상처를 감싸 안을 용기, 무너진 관계에도 다시 한 번 길을 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미움은 순식간에 관계를 무너뜨리지만, 사랑은 비록 느리게 쌓이더라도 끝내 단단하게 관계를 다시 세운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사랑은 결국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구원한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 속담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당신의 마음을 지키라. 그 마음이 당신의 삶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