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작가

1931년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박서보는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등 3명의 젊은이와 함께 ‘4인전’의 반(反)국전 선언을 벌였다. 국가에서 주관해 온갖 문제와 시비가 끊이질 않았던 대한민국 국전이 기승을 부릴 때에 벌어진 이들의 반국전 선언은 곧 사실상 화가로서의 장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1958년 ‘현대미협’에 가담하면서 ‘뜨거운 추상’으로 불린 앵포르멜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렇게 한국 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등재한 그는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미술운동 선두에 섰던 청년작가였다.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지지자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박서보는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를 빼놓는다면 한국 현대미술의 연표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다. 5~60년대의 앵포르멜, 70년대의 모노크롬, 그리고 80년대의 한지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 미술의 산 역사를 걸어왔다. 그의 화력(畵歷)은 한국 현대미술과 함께 성장하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혹자는 그를 살아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한 화가를 향한 그런 찬사와 호칭이 그가 그림 작업을 시작한 지 60여 년이 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데서 박서보와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와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박서보의 작품세계는 1957년에서 60년대까지 원형질 시대. 60년대 중반에서 70년까지의 유전질 또는 허상의 시대, 70년대 초에서 80년대 후반으로 이어지는 묘법 시대, 그리고 80년대 이후 후기 묘법 시대(오광수)로 구별한다. 90년대 이후로는 색채의 시대로 이어진다.

이는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의 형태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그러나 초기 그의 원형질 시기에 작업은 다분히 당시 우리가 겪었던 여러 가지 현실을 반영하면서 비구상 형태의 양상을 보여준다.

공개적으로 작가 경력을 쓰는 곳에 그는 1957년 뉴욕의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현대 회화전을 언제나 들고 있다. 그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그의 회화적 형상의 전개는, 다분히 인체의 형상을 근간으로 한 구성적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묘법(Ecriture) No.4-06, trial proof, 76x56cm, 2006 ⓒ박서보
묘법(Ecriture) No.4-06, trial proof, 76x56cm, 2006 ⓒ박서보

그런 그가 이름을 날리며 주목받기 시작한 전시는 1961년 세계 청년 화가 파리대회다. 그는 다른 작가보다 서양 현대미술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이미 자신이 받아들인 서구의 추상 표현주의 미학을 기초로 ‘서양문화에 저항하는 원형질(原形質) 시리즈’를 선보였다.

60년 중반 그는 누워있는 인체의 묘사를 색 띠로 장식화한 모습에 그래픽적 요소를 가미한 ‘허상(虛像)’ 연작들을 발표했다. 

다소 의외이기는 하지만 70년대에 이르러 그는 소위 ‘손의 여행’으로 불리는 묘법(猫法) 시대로 변화를 주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심화시키며 깃발을 달았다. 우리가 그의 예술 행위를 ‘손의 여행’이라고 했지만, 그에게 그것은 오히려 손의 여행이라기보다는 동양적인 의지와 초연함이 빚어낸 선적 수행에 출발과 깊이를 지녔다는 점에서 그 작업은 주목되고 예견되었다. 

과연 그의 정신적 영혼이 기대어 있는 예술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의 작업의 원형 즉 그의 회화에 예술적인 근본 세계는 의외로 낯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작업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67년쯤 세 살 난 둘째 아들놈이 초등학생 형의 국어 공책에 글씨를 써넣으려고 애를 쓰더군요. 칸 사이에 뜻대로 글씨가 들어가지 않아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합디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반복적으로 연필로 내갈기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그는 후일 ‘체념’의 세계관을 깨닫게 했고, 그 감정을 작품에 풀어낸 것이 묘법의 시작이라고 털어놓았다. 

1967년 ‘탈 이미지’를 표방함으로써 열리게 된 ‘묘법’ 시리즈는 70년대에 이르러 ‘평면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균제 된 화면에 정적으로 그려진 묘법은 마치 부드러운 옷감의 부분에 텍스츄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고요함 속에 정중동의 자태를 드러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그는 선의 리듬 폭과 형태가 커지면서 1981년을 전후해서는 묘법의 극치와 정수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화면을 변주해가면서 묘법 화면을 만들어 냈다. 이전의 정적인 자세에서 나와, 보다 다이내믹하면서 리듬감 넘치는 음악적 제스처로 그의 화면은 극대화됐다.

1980년대 말에 이르면 그는 일정한 방향과 리듬의 선 긋기에서 벗어나 좌우 상·하의 다방향으로 긋기의 다양성을 구사했다. 그 변화는 단순히 시각적인 화면의 변화만은 아니었다. 

묘법(Ecriture) No.931204, 1993 ⓒWhite Cube<br>
묘법(Ecriture) No.931204, 1993 ⓒWhite Cube

초기 ‘묘법’과 후기 묘법의 변화가 기본적으로 표현의 이미지에도 있지만, 초기의 재료가 캔버스와 종이 기름 등 연필을 중심으로 했다. 이 후기의 묘법은 캔버스 위에 한지와 수성안료로 입체적인 효과를 충분히 나을 정도로 시각적 다양화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이 변모하는 가운데도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박서보의 초기 묘법이 캔버스에 유백색 또는 분청을 연상시키는 기초화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 물감이 응고되기 이전의 젖은 상태에서 화면에 연필 또는 철필로 일정한 길이의 선들을 반복적으로 긋고 때로는 그 형태로 리듬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방법이 중요하게 수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면에는 작가가 예술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심적인 평정에 도달하려는 명상적 행위로 추정된다. 그래서 ‘무수히 반복되는 선 긋기의 행위성을 통해 자신을 순화시켜 나가는 무위자연의 이념’이 스며들어 있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은 그래서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그의 회화에 있어 행위와 표현은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수없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점이 이것을 증명한다.

나는 여기서 그의 예술이라는 행위가, 마르기 전에 선을 긋는 과정,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과 삶을 체득하고 생각하며 모든 순간이 그의 예술 행위 속에 이미 용해되었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예술 행위가 다분히 신석기 시대인들의 빗살 무늬 토기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릇이 마르기 전에 그곳에 일정한 형태의 빗살 무늬 형태의 문양으로 토기를 만든다. 그들에게 어쩌면 빗금은 하나의 원시적인 감각의 표출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이런 패턴과 박서보의 작업 패턴과는 놀랍게도 일치한다.

물론 그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그가 화면에 그러한 선을 긋는 행위에서 그는 예술이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임을 강하게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어쩌면 그 행위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Dripping) 회화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하는 공통성이 있다. 잭슨 폴록이 화면을 향해 물감을 뿌리는 행위가 화폭과 작가와의 거리가 내맡겨진 상태에서 뿌려진 것이라면, 박서보는 더욱 밀착된 상태에서 무의식적인 화폭과 나와의 대면적 태도를 보이면서 새로운 화면을 창출하며 그 행위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 

일찍이 평론가 나케하라 유스케는 “박서보는 과연 선을 긋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유화물감의 물질을 돋보이게 하려고 의도하고 있는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전제하고 이들 작품을 드로잉과 페인팅 성격이 혼재된 것으로 박서보의 작품의 특질은 이 양의성에 있다고 정의하고 장․포트리에와 싸이 톰블리의 작업과 비유하고 있다. 

묘법(Ecriture) No.051023, 혼합재료, 50x40cm, 2005 ⓒ박서보
묘법(Ecriture) No.051023, 혼합재료, 50x40cm, 2005 ⓒ박서보

그런 다양한 변용의 흐름 속에서도 그의 회화의 역정은 마치 탈 이미지적이고, 탈 표현적인 작품들로 일관된다. 그뿐만 아니라 화면을 일탈하지도 않고 화면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팽팽한 양상을 언제나 주고 있다.

그의 고집스러운 예술관은 50년 넘게 그려온 ‘묘법(描法)’ 연작이 증명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을 내려가는 직선과 단조로운 네모꼴. 감정이 철저하게 배제된 단순한 구성과 색채, 그 작품 속에 내재 된 기하학적 형태와 선의 의미 등 면과 선의 대응 혹은 공존을 통해 자신의 무념적 예술을 정당화한다.

최근 그는 집요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해왔던 블랙과 회색 색채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 다양한 색채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직사각형을 화면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는 등 김복영이 명명한 후기 묘법의 가능성에 도전 과정을 지나왔다. 그것은 곧 후기 묘법을 위한 색과 깊이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열정 모두가, 그림을 그리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 정제를 위한다는 점이다. 그는 고백했다. 

“수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이 제 작업이다. 나를 무화(無化)시키는 것, 금욕적으로 나를 비워낸 결과가 내 작품."이라고 최근 그의 작업세계는 무채색 일변도에서 벗어나 흑색 위에 백색을 바르거나 보랏빛이 나도는 바탕에 붉은색을 중첩하는 작품 경향에서 그가 자신의 이념과 상념을 비워내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고단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작업 속에서 마치 고행하는 수도자의 잔인할 정도의 이성과 치열함이 빚어내는 묘법의 초상을 본다. 

“형태도, 색의 대비도 벗어버리고 콤포지션도 포기하며 마침내는 자신의 작업수단을 모노크롬의 마티에르와 검정 연필의 반복되는 스트로크 (선 긋는 일)만으로 환원 해버리고 말았다”

미네무라의 이 표현은 그가 얼마나 일체의 표현에 절대적으로 몰입하고 있는가를 확인시켜준다.

그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주목할 만한 대규모 개인전을 치러냈다. 90대 원로작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작품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보이고 있다. 거기서 두드러진 특징은 새로운 이전에 금욕적이었던 작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양한 색채의 출현이다. 이제까지 흑색을 고집해오던 작가가 최근 들어 자신 특유의 흑백의 톤에서 초월한 듯 다양한 색상을 구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회색 작업에서 더욱 이성적으로 초월한 박서보만의 원숙한 색채에의 초월의 깊이를 보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묘법(Ecriture) No.060728, 혼합재료, 2006 ⓒ국제갤러리<br>
묘법(Ecriture) No.060728, 혼합재료, 2006 ⓒ국제갤러리

또 하나 그의 비밀스러운 고백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명품 부티끄를 들른다고 했다. 거기서 그가 구하는 것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쓰는 색채를 확인하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루이뷔통이나 샤넬이나 베르사체, 에르메스, 아르마니 그들이 만드는 쟈겟이나 넥타이 트렌디한 가방의 색채를 보기 위해서라며 작업실 책상 뒤의 캐비닛을 열어 보여주고 했다. 

2007년 경기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 100여 점의 작품들은 모두 그렇게 탄생했다.

그래서 박서보 작품의 색채에서는 그 어느 것도 촌스럽다거나 덜 세련된 색이 없다. 난 박서보 작가가 우리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작가라는 것을 여기서도 발견한다.

처음부터 그의 회화는 화면에 그려진 한줄 한줄에 절제된 감성과 화면에 대한 이성적 태도가 우리를 매혹시켰다. 그러한 그의 작업 태도는 많은 작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깊은 동양적 정신세계와 노자의 무위 자연적인 세계관을 관통하여 평면 회화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작가의 깊은 열망을 궁극적으로 반영했다.

어쩌면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의 회화는 화가의 행위성이 끝난 시점이 곧 작품의 종결이라는 서구적 방법론을 넘어 그 위에 시간이 개입된 변화의 여정을 거친 후에야 인생과 예술이 완성에 다다른다는 깊은 동양회화 사상을 아우르고 있다.

결국, 그의 예술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림이란 자기 자신의 성찰을 위한 쉴 수 없는 행위이며, 득도를 위한 수련이자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가 빈번하게 자신의 작업 속에서 무아지경에 빠지고 자신을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이제 그가 인간을 이해하고 예술을 이해한다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고 나는 정의 한다.

우리가, 아니 그의 회화가 다른 서양의 어느 유명작가보다 더 철학적이고 심오한 감정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예술이 인간의 완성을 최후의 목적으로 이상을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만약 박서보 회화를 평가할 때 이러한 동양적 사유 행위와 철학을 간과하고 통찰, 해석한다는 것은 그의 그림에 껍데기를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가 기성세대를 향한 테러리스트나 박서보 사단의 보스라고 힐난받더라도, 그만큼 동시대 미술에 영향력을 끼치고 미술계를 이끌고 온 사람도 드물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것을 오로지 작품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1950년 후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과거 자신의 초상에 빠져 있지 않고, 90대의 나이에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담금질하고 대결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란 자기 세계를 위해 마지막까지 화폭과 싸워가며 그 화폭에서 목숨을 던지는 일일 것이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우리 시대에 다시 그런 작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우울하다. 그렇기에 할 일이 너무 많아 적어도 300살까지 살아야겠다고 발언했던 쿠사마 야요이와의 인터뷰가 박서보의 실제 삶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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