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기다리며》를 읽다. 이번에는 이 현대적 고전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보다 그녀가 소비되는 방식을 잠깐 생각해보고 싶다.
파토스의 시대와 시몬 베유
시몬 베유의 책과 관련 서적들을 새롭게 읽기 시작하면서 문득 궁금해서 20세기 후반에 번역된 그녀의 책들을 조사해 봤다. 그러자 나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30여 권을 헤아릴 정도로 많은데, 실제로는 중복 번역이 허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경우들을 제외하고, 이번에서야 알게 된 것들만 아래에 소개해본다.
▪ 운명의 시련 속에서(문예출판사, 1972)
▪ 영혼의 순례(문예출판사, 1972)
▪ 사랑과 죽음의 팡세(문예출판사, 1977)
▪ 하늘과 땅의 침묵(저유문화사, 1987)
▪ 고독과 상실의 뜰을 지나(안암문화사, 1988)
▪ 여기 존재의 이유가(지문사, 1988)
▪ 그대 괴로움이 다시 나를 울릴 때까지(오상출판사, 1989)
▪ 회색빛 고독 속에서(청조사, 1989)
▪ 고뇌로 채운 내 젊은날의 노트(늘푸른집, 1991)
▪ 행복한 사람에게 사랑이란 실의에 빠져있는 이의 괴로움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오늘의책, 1992)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오늘의책, 1997)
▪ 내 영혼 다 태워서(청조사, 1999)
이 11권의 제목들을 보며 놀랐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오글거리는 제목들로 지을 수가 있지? 내 손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스타일이 아닌가. 이는 물론 197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거의 한 세대가 공유한 특유의 감성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전혜린의 에세이집 제목도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20세기 후반은 (에세이라기보다) 수필이라 불리는 문학 장르가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보면, 시몬 베유의 작품들 또한 수필문학처럼 포장된 것이다. 생산자(출판사)와 소비자(독자) 모두 파토스가 넘치던 시절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 독자들 또한 이러한 틀 속에서 시몬 베유를 독해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게다.
더욱이 엄혹한 시절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더욱 파토스가 분출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몬 베유를 다루는 일본책 《완전한 순수》(도도, 1991)의 역자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인공 중 하나인 김은숙이다. 가톨릭 신앙과 좌파적 신념의 접점에 서있는 인물이니 시몬 베유에게 동일시해도 이상하지 않다(원래 개신교인이었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시몬 베유, 전인적 영성의 혁명가
시몬 베유는 로고스와 파토스, 그리고 에토스까지 온전히 겸비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지성인이며, 투사이자, 영성가였다. 너무 이른 죽음의 운명(향년 34세)을 맞이한 그녀는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은 원고들로 교계와 학계 등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충분히 더 큰 사상적 기여를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이에 비견할 만한 20세기의 인물로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히틀러 암살단의 연락책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정도이다. 향년 39세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도소에서 작업한 미완의 산물로 신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 역시 예리한 지성과 심오한 영성 못지않게 예민한 양심을 갖고 있었기에 나치에 저항했고, 그 결과는 총살이었다.
여하간 20세기 후반은 파토스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출판계는 그녀의 파토스에 주목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도한 파토스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웠다. 저 낯간지러운 제목들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와서 부적절한 작명을 따지려는 건 아니다. 그 시대에는 시몬 베유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웠을 게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거울
하나 이제는 시몬 베유를 파편적으로 볼 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엘리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를 택하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고자 적게 먹어서 건강이 악화되고 급기야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나 그게 다는 아니다.
《일리아스 힘의 시》가 보여주듯, 그녀는 좌파 혁명가였지만, 그러나 정통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또한 《신을 기다리며》가 보여주듯 그녀는 기독교 신앙인이었지만, 세례 받고 교회에 소속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좌파임에도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길을 걷고, 기독교인이나 교회 공동체에 몸을 담지 않았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그녀의 처지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게 바로 시몬 베유가 걸어간 길이며, 그녀가 받은 사명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지만 교회에 소속되기보다는 세상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세상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놓인 긴장을 감수한다. 그녀 자신의 지성 또한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서 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해 주세요. 그리스도교가 육화하는데 절대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요. 다름 아닌 ‘파문이다’anathema sit라는 말의 사용입니다. 그 말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까지 그 말이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역시 제가 교회를의 문턱을 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교회 안에, 이 만유의 집합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것 편에 제가 남아 있는 것도 바로 이 짧은 말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지성 또한 그들 가운데 하나이기에, 저는 더더욱 그들 편에 남게 됩니다.”(74쪽)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시몬 베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언어가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심오한 지성만이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언어를 통해 그녀의 고결한 영혼을 읽게 된다. 그녀가 피로 써내려간 글을 한줄한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녀의 인격을, 또한 그녀의 영성을 만난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제가 염려할 일이 뭐 있을까요? 저를 생각하는 건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저의 일은 신에 대해 생각하는 거에요. 저를 생각하는 건 신의 소관이고요.”(39쪽)
《신을 기다리며》를 펼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거울로 삼으면 좋겠다. 이러한 독해 방식 안에서 외려 시몬 베유의 예리한 지성과 섬세한 감성, 심오한 영성이 가장 조화롭게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무쪼록 더 많은 독자들이 《신을 기다리며》를 읽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