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정치는 단순한 만남과 말의 교환이 아니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고, 어떤 문장을 꺼내며, 그 뒤에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가가 곧 권력의 신호이자 계산이다. 여야 지도부가 대통령 주재 오찬에서 악수를 나눈 지 불과 하루 만에 다시 강대강 대치로 돌아간 것은, 한국 정치가 여전히 ‘의례적 화해’와 ‘실질적 대결’ 사이의 간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루 전 ‘하모니 메이커’, 하루 뒤 ‘선전포고’
8일 용산 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은 여야 대표들을 불러 오찬을 열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정 대표는 대통령을 ‘하모니 메이커’라 부르며 덕담을 건넸고, 장 대표 역시 “마늘과 쑥을 먹고 기다린 끝에 악수에 응해줘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한국 정치의 살벌한 문법 속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악수는 지속적 화해의 출발점이 되지 못했다. 하루 뒤,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청래 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국민의힘을 ‘내란 세력’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내란 세력과 단절하지 못하면 위헌 정당 해산 심판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발언은 의례적 화합의 무대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이 장면은 정치적 제스처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곧바로 이어지는 제도적 행동과 화법이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루 전의 악수는 ‘인증샷’으로만 남고, 다음 날의 연설은 정치적 권력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정치문법상, ‘악수’는 화해와 협력의 신호지만, ‘연설’은 대중과 정치권 전체를 향한 실질적 메시지다. 결국 더 큰 무게는 후자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번 사례는 ‘의례적 화합의 제스처’와 ‘정치적 현실의 대결 구도’가 얼마나 쉽게 충돌하는지 잘 보여준다.
여야가 만난 자리에서 만들어낸 상징적 장면이 하루 만에 무너진 것은, 한국 정치가 여전히 ‘정치적 이벤트’와 ‘정치적 구조’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청래 “내란 세력과 단절 못하면 해산”
정청래 대표의 연설은 정치적 수사라기보다 명확한 경고였다. 그는 “완전한 내란 청산이야말로 보수가 도덕적으로 부활할 기회”라며, 국민의힘이 과거의 그림자와 결별하지 못하면 헌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단순한 과거사 논쟁을 넘어, 현재의 정치 경쟁 구도에서 상대를 정당성 없는 세력으로 규정하려는 전략적 화법이었다.
정 대표는 또 ‘3대 특검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주장하며, 검찰·사법·언론을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지목했다.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대법관 증원과 법관평가제 도입, 가짜뉴스 근절법,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법 등 구체적 개혁 방안을 나열한 것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입법 드라이브를 공언한 것이다. 이는 ‘개혁’이라는 가치와 ‘내란 청산’이라는 의제를 하나의 축으로 묶어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정 대표의 화법은 민주당 지지층에게는 ‘정의 구현’의 언어로 들리지만, 국민의힘에게는 ‘정치적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특히 ‘위헌정당 해산’ 언급은 상대를 제도 정치의 합법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호이자, 협치의 문을 좁히는 발언이 된다.
정치 문법상, 상대를 ‘불법’ 혹은 ‘위헌’으로 규정하는 순간, 협상의 공간은 좁아지고, 충돌의 공간은 넓어진다. 이 점에서 정 대표의 연설은 정치적 결집을 위한 내부 동원에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외부 확장과 협치 복원에는 역설적으로 제약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정 대표의 발언은 민주당이 선택한 ‘강공 드라이브’의 상징적 표현이자, 국정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수사였다.
장동혁 “거울 보며 독백한 연설”
장동혁 대표의 반격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여당 대표 연설이 민생보다 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지적하며, 정 대표의 화법을 ‘명비어천가’와 ‘자화자찬’으로 치부했다. 이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민주당을 ‘국민의 고통에 무심한 권력자 집단’으로 규정하려는 정치적 대응이었다.
장 대표는 또 “민주당 일당독재 시대 아니냐”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정 대표의 ‘내란 세력’ 규정에 맞서, 민주당을 ‘독재 세력’으로 규정하는 대칭적 화법이다. 정치문법상, 이런 대칭적 규정은 상대의 프레임을 무력화하고, 동시에 지지층에게 “우리가 피해자”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낸다.
특히 장 대표는 “양보가 아닌 선전포고였다”는 표현을 통해, 협치의 실패 책임을 민주당에 돌렸다. 하루 전 악수를 나눈 장면과 대비되면서, 국민의힘 지지층에게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민주당이 거부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또한 장 대표는 연설의 이념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미국 조지아주 한국 근로자 구금 사태 등 구체적 민생 문제를 언급했다. 이는 ‘민생 정당’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의도이자, 민주당의 ‘이념 과잉’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적 수사다.
정치문법상, ‘민생’과 ‘이념’의 대립 구도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장 대표의 언급은 단순히 민주당의 연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프레임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 균형추의 언어
흥미로운 점은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여야 대표 회동에서 “저는 민주당 출신이지만 이제는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또 “야당의 목소리도 국정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하며, 장동혁 대표의 일부 우려에 공감한다고 했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균형추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정치문법상, 대통령은 집권 여당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국가 전체의 조정자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두 역할 사이에서 ‘균형’의 언어를 선택했다. 여당에는 “더 많이 가진 만큼 더 양보하라”는 메시지를, 야당에는 “여러분 목소리도 반영하겠다”는 신호를 동시에 보낸 것이다.
이는 단순한 화법이 아니라 전략적 포지셔닝이다. 대통령이 여당의 강공과 야당의 반발 사이에서 균형의 이미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모두의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협치의 문을 닫지 않겠다는 신호다.
다만 현실 정치에서 대통령의 균형 언어가 실제 협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국회의 구조적 대립 구도와 정당 간의 신뢰 부족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재명 대통령의 언어는 ‘정치적 조율자’로서의 이상을 보여주지만, 당내 강경 기류와 야당의 불신을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남긴다.
협치의 문 열렸지만
여야는 민생경제협의체 구성에 합의하며 협치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하루 만에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다시 대치 국면으로 돌아갔다. 협치는 제스처로 시작하지만 제도와 행동으로 이어져야 가능하다. 카메라 앞에서의 악수가 보여주기식 협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법안 표결과 예산 심의에서 실제로 작동해야 한다. 이번 사례는 그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첫째, 당장 정기국회 안건이 협치의 시험대이다. 검찰·사법·언론개혁 법안과 특별재판부, 특검법 개정안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가장 첨예한 지점이다. 어느 한쪽이 ‘승리’로 기록되면 상대는 ‘패배’로 각인하는 제로섬 구조에서, 협의체의 합의는 쉽게 정치적 원심력에 휘둘릴 수 있다.
둘째, 예산과 인사·사법 이슈가 동시에 굴러가는 ‘멀티트랙 정국’은 협상의 여지를 주면서도, 반대로 상호불신을 증폭한다.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지역 SOC·산업전략을 놓고 협력을 말하더라도, 본회의장에서 체포동의안·사법개혁 표결이 맞부딪히면 순식간에 교착상태로 돌아간다. 같은 날 다른 무대에서 상반된 메시지가 교차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일상이다.
셋째, 민생경제협의체가 성과를 내려면 주제·의제·시한이 명확해야 한다. ‘청년고용’, ‘주식양도세 대주주 기준’, ‘지방건설 원가구조 개선’처럼 비교적 합의가 가능한 테마부터 파일럿으로 처리하고, 결과물은 법률·예산·행정명령 중 무엇으로 언제 구현할지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협의체가 ‘사진’이 아니라 ‘문서’로 남을 때 정치적 효용이 생긴다.
넷째, 대통령의 ‘더 많이 가진 쪽이 더 많이 양보하라’는 주문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여당 내부의 동의와 야당의 신뢰가 동시 충족돼야 한다. 협치의 문법은 결국 ‘내부 설득’과 ‘상대 인정’이라는 두 개의 문을 함께 열어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닫히면, 협의체는 속 빈 강정이 된다.
마지막으로, 협치는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절차가 축적돼야 가능하다. 정례 회의 캘린더, 의제 공개, 이견 조정 프로토콜, 성과 평가지표 같은 제도화가 뒤따라야, ‘하루짜리 악수’가 ‘장기적 신뢰’로 전환된다. 정치의 문법은 상징으로 시작해 제도로 완성된다. 이번 정기국회는 그 전환을 시험하는 무대다. 결과가 곧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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