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정치문법은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행위이자, 그 문장 너머에 작동하는 권력 구조의 방식이다. 말은 겸손을 가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힘의 배분, 책임의 회피, 전략적 거리두기가 숨어있다. 정치적 언어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암시하고, 책임의 경계를 설계하며, 법적 결과를 예비하는 신호이다.
“국민 여러분께,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심려를 끼쳐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지난 6일 김건희 전 대통령 부인이 민중기 특별검사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면서 남긴 한 문장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가볍지 않다. 전직 대통령 부인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사기관 포토라인에 선 날, 겸손한 표현으로 포장된 이 발언은 단지 ‘사과’에 머물지 않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규정에 있다. 한때 대통령 부인으로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 자신을 권력 밖의 인물로 설정하는 이 말은 겸손의 형태를 띠지만, 실은 법적·정치적 책임으로부터의 거리두기이자,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기 위한 이중적 문법이다.
겸손의 역설…책임회피 전략, ‘권력과 무관’
김건희씨는 이날 오전 10시 23분 서울 광화문 KT웨스트빌딩 내 특검 사무실에 도착해, 포토라인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자처했다. 검은 정장 차림에 14만원대 ‘HOPE’ 문구 에코백을 들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선 모습은 ‘피의자 김건희’의 상징적 이미지로 남았다.
전·현직 대통령 부인이 공식 수사기관에 피의자로 소환돼 포토라인에 선 건 헌정사상 처음이다. 그러나 그 상징성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이후 드러난 진술의 내용이다. 김씨는 사과했지만,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이 같은 김씨의 태도는 자신은 ‘권력과 무관하며, 실제 결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라는 정치적 알리바이를 까는 행위로 비춰진다. 권력의 실체를 지우려는 시도로 해석되며, 향후 조사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전략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윤석열 집권 당시 김씨는 이른바 ‘V0’로 불릴 만큼 실세였다고 비공식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비화폰(암호화 보안 휴대폰) 사용’ 정황이다.
공식적으로 대통령, 대통령실 부속실장, 수행실장, 경호처장 등 5명에만 지급되는 비화폰 중 1대가 김씨에게 할당되었고, 이는 국가 최고 권력망에 실시간 접근이 가능한 구조였다. 정황상 ‘아무것도 아닌 사람’ 김건희는 아닌 것이다.
혐의 부인으로 드러나는 김건희의 ‘겸손 문법’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특검은 단순 방조가 아닌 ‘공모’에 초점을 맞춰 집중 추궁했다. 특히 “수익의 40%를 주기로 했다”는 녹취록과 계좌 관리 정황 등, 서울중앙지검의 불기소 결론을 뒤집는 증거가 새롭게 수면 위로 떠 오른 상태다.
이에 대해 김씨는 “주가조작이 이뤄진 2010~2012년 당시 서울대 eMBA 과정을 듣느라 주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며 “주가조작에 가담한 바 없다”고 진술했다. 계좌 운용자에 대해선 “권오수 전 회장이 ‘선수’를 소개시켜 준 건 맞지만, 비전문가이고 이상한 사람이라 투자해서 손해만 봤다”고 주장하며, 직접 지시·개입이 아닌 ‘실패한 투자자’로 자신 위치를 설정했다.
이는 ‘V0’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대통령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그간의 외부 평가와는 전혀 다른 자기 인식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문법과 궤를 같이한다.
명태균씨로부터 여론조사를 받고, 김영선 전 의원의 공천을 약속했다는 ‘공천 개입 의혹’도 김 씨는 전면 부인했다.
특검은 “무상 여론조사 제공의 대가로 공천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정황에 주목하고 이날 조사를 이어갔다.
김씨의 입장은 분명했다. “나는 힘도 없는 사람인데, 명태균씨와 김 전 의원이 자꾸 연락해 와서 대통령실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끊어냈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일방적으로 먼저 보낸 것이고, 대가나 약속은 없었다”고 했다. 권력 개입이 아닌 피로감의 결과로 정리하며 공적 책임에서 철저히 선을 그었다.
‘공직자 재산신고 누락’ 논란에 휘말린 ‘반클리프 목걸이’에 대해서도 김씨는 “2010년 모친에게 선물로 준 모조품”이라며, “중요 행사에 빌려 썼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이 목걸이가 오빠의 장모 집에서 발견된 점에 대해선 “나토 순방 당시 논란이 커지자 오빠가 들고 간 것”이며 이후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특검은 샤넬백과 목걸이 등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통일교로부터 받은 고가 선물 의혹도 함께 조사했지만, 김씨는 해당 의혹 역시 부인했다. “건진법사로부터 어떤 선물도 받은 바 없으며, ‘건희2’라는 연락처도 본인이 아닌 행정관의 번호였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김씨의 일관된 진술은 “몰랐다”, “받은 적 없다”, “약속한 적 없다”라는 부인(否認)의 삼단 논법으로 구성돼 있다. 언뜻 겸손하게 들리지만, 이는 철저히 준비된 법률적 방어 전략이다.
겸손 문법, 법의 언어가 응답할 차례
이날 김씨의 소환 조사는 총 7시간 23분 동안 이뤄졌으며, 조사 후 3시간에 걸친 조서 열람을 마치고 김씨는 저녁 9시경 귀가했다. 조사 도중 특검은 ‘예우 없이’, ‘피의자’로 호칭을 통일했고, 티타임이나 의례적 인사도 생략했다.
특검팀은 7일 김씨에 대한 추가 소환 없이 곧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명태균 공천 개입, 건진법사·통일교 로비 의혹, 고가 사치품 수수 등을 중심으로 수사망을 좁히고 있으며, 향후 ‘삼부토건 주가조작’, ‘양평고속도로 변경’, ‘IMS모빌리티 게이트’ 등으로 수사가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씨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라는 발언은 스스로를 권력 외부인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 언술을 통해 특검 수사에 대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련의 복합적인 정황은 김씨가 단순한 ‘조용한 내조자’가 아니라 ‘실질적 결정권자’였다는 정치적 평가를 가능케 한다.
정치는 말로 권력을 꾸미고, 권력은 그 말로 책임을 분산시킨다. 정치에서의 겸손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책임을 누구에게 넘기느냐의 수사학일 수 있다. 김건희의 언어는 책임의 경계를 허물고, 권력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 겸손의 문법은 너무도 정치적이다. 이제는 법의 언어가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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