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지음 | 176쪽│110×178│1만2000원│제철소
세 시간 동안 실내에서 걷기만 했을 뿐인데, 왜 국토 종주라도 한 듯 진이 빠지고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걸까. 머리는 멍해져 어느덧 ‘저것은 노랑이요 저것은 빨강인가?’ 수준이 된다. 알고 보니 이 증상에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뮤지엄 레그(Museum Leg)’. 나만의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 많은 이가 겪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브르 같은 대형 미술관뿐만 아니라 작은 미술관을 돌아본 뒤에도 우리는 종종 ‘뮤지엄 레그’에 시달린다. 도대체 왜 그럴까? -84p
【투데이신문 김지현 기자】개성 강한 필자들이 한 가지씩 매료된 것들에 관해 펼치는 에세이 시리즈 ‘아무튼 시리즈’의 여든 번째 책 <아무튼, 미술관>이 출간됐다.
<기울어진 미술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등에서 미술계를 둘러싼 권력 구조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짚어온 이유리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한층 사적이고 진솔한 시선으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다시 바라본다.
<아무튼, 미술관>은 작가가 오래도록 미술관을 드나들며 그곳에서 어떻게 위로받고 성장했는지, 잊지 못할 순간들을 차분한 문장으로 담아낸 에세이다. 어린 시절 신문과 잡지에서 명화를 오려 스크랩해 ‘나만의 미술관’을 만들던 기억부터, 런던 어학연수 시절 갤러리를 원없이 드나들던 경험, 그리고 천경자의 그림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순간까지, 미술관이 그의 인생의 결정적 장면마다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관람 중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전하는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 미술관에서 다리가 유독 피로해지는 ‘뮤지엄 레그’의 정체, ‘무제’라는 제목을 단 작품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액자와 굿즈가 갖는 남다른 의미까지 살펴본다.
더불어 작가는 미술관과 작품, 예술가를 둘러싼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 내면을 탐구하도록 이끈다.
“독자와 둘이서 미술관을 거니는 듯한 마음으로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을 모두 읽고 나면 도란도란 그와 함께 매우 사적인 전시관을 함께 관람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유리 작가는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을 통해 미술 칼럼을 연재해며,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해왔다. 또한 여성의 시선으로 본 예술사와 ‘을’의 편에 선 예술가를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아무튼, 미술관>은 예술의 문턱 앞에서 주저했던 이들에게, 그리고 미술관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