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깡!야구공 하나가 알루미늄 배트 특유의 금속음과 함께 야구장 외야로 날아올랐다. 높이 솟아오른 타구는 생각보다 쭉쭉 뻗어나갔다. 최종 종착지는 우측 외야의 경계이자 담장 역할을 하고 있던 나무들 사이였다. 아마추어 우타자가 우중간 쪽으로 홈런을 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나무들 사이에 떨어진 타구는 어떤 판정을 받을지 궁금했다. 투수 뒤에 서 있던 주심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인 것 같았다. 판정은 바로 나오지 못했다. 심판은 잠시 고심하더니 이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하늘 방향으로 휘휘 돌렸다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서점에 가면 들러보는 섹션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람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겨나고, 그에 관한 책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서점에서도 그런 책들을 따로 모아놓은 공간을 가판대 한 곳에 마련해둔다. 상처받지 않는 법을 비롯해, 말싸움에서 이기는 기술과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법 등 사람들이 평소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거의 모든 전형과 해결책들이 고전과 신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기다린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오빠. 저는 불꽃같은 사랑이 하고 싶어요. 그해 겨울, 우리는 길었던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이제 막 새로운 세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간의 어려운 과정들 속에서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에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유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몸이 좋지 않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몇 번인가 식사를 같이 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대화를 나눴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각자 새로운 공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1997년 9월초,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복잡한 개인사로 인해, 원치 않는 미국 어학연수 길에 오른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 오른쪽으로는 두 좌석이 더 붙어 있었다. 나의 오른쪽에는 중년의 백인(이하 A)이, 그리고 그 옆 복도 쪽에는 한국인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부터 가운데 앉아있던 A는 자꾸 그 옆의 한국인 아저씨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다. 그 아저씨 역시도 낌새를 눈치 채고, 혹시나 말을 걸어올까 계속 경계하는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언젠가 극장에서 어떤 히어로 물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보통 영화는 혼자 보러 가는 편이지만, 그날은 다른 지인과 함께 보게 되었다. 당시 그 영화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나 평이 좋았기에, 여기저기서 호의적인 평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영화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만한 작품은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함께 영화를 보았던 지인은 나와 달리 꽤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흥분된 어조로 자신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몇 년 전 여름밤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어느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검은 풍경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그 위에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해외 카툰 하나를 슬며시 띄워보았다.카툰은 위아래 두 개의 장면으로 이뤄졌다. 위에는 Juan이라는 사람의 SNS 대문 캡쳐와 함께 무려 3,450명의 가상 세계의 친구가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래에는 그의 장례식 모습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오직 현실 세계의 친구 한 명뿐이었다. ‘현실은 키보드의 세계 바깥에 존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지인의 지인, 그러니까 사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 여성 A는 아들 삼형제만 있는 집안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아들만 셋을 키워왔던 시부모는 이 첫 번째 며느리를 그렇게나 예뻐했다. 마치 내 딸인 양 며느리를 대하겠다는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지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이 시부모는 상견례 자리에서 꺼냈을 그 말 그대로 잘 대해줬다고 한다. 당사자인 A가 지인들 앞에서 자기 본위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러했으니, 실제로도 분명 좋은 분들이셨을 테다. 그렇지만 A씨는 그럼에도 불구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일을 하다 보면 상급자의 지시내용이 명확하지 않거나, 의뢰인으로부터의 요구사항이 모호한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면 결국 일을 이중삼중으로 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들은 시대가 변화해도 좀처럼 그 빈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갑이 을에게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일 문화가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이지 싶어진다. 처음부터 지시사항이 명료했더라면 일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지시한 사람 역시 더 편했을 텐데 왜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일까.일단 지시를 내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공개사과 요구. 대학 학부생이던 시절 학내 대자보에서 그와 같은 표현을 마주할 때면, 다행히 내가 그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늘 불편했다.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하나는 그런 방식으로 순리에 맞게 문제가 해결된 적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펼쳐지게 될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에 미리부터 지쳐버리곤 했다. 다른 하나는 어찌 보면 사회적 관계에 치명타를 안길 수도 있는 처벌의 잣대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몇 년 전이었을까. 어느 휴일 오후였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집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가게에는 나 말고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주문한 김밥과 라면이 차례로 나왔다. 그렇게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순간,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검은 뿔테 안경의 풍채 좋은 젊은 남성을 따라 가게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책임자로 보이는 청년의 지시에 따라 한 쪽 테이블을 이어붙인 뒤에 나란히 앉았다. 워낙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단체손님들이라 그랬던 것도 있지만,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오래전 모 케이블 방송국에서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일주일에 하나씩 뉴스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났던 어느 날,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던 작가로부터 조금은 뜬금없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기자님께서 보내주시는 기사 초고에 비문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 주세요.”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한편으로는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당시 내 기사의 문장이 이상하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집안 사정 때문에 1,2년에 한 번씩은 전학을 다녀야 했던 국민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라는 표현이 더 내 것처럼 느껴진다. 전학을 가서 새로운 교실과 아이들 틈에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면 아무래도 동물적인 본능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 위험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각각의 무리들과 당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외되어 있는 아이의 구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A가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마도 그런 전학 초기의 심리상태 때문이었던 것 같다.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얼마 전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하루 차이로 같은 질문을 듣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선생님은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똑같이 망설였다. 글쎄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를 보며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역시나 같은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이 선생님께서는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시는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해 늘 자책감에 시달리시지는 않나요. 타인들의 시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20여 년 전 대학 학부생이었던 시절, 모 교수님의 강의 때 있었던 일이다. 중간고사였는지 아니면 기말고사였는지 정확치는 않지만 시험 전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업시간은 어느덧 후반으로 접어들었고,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수업을 그리 열심히 듣는 학생이 아니었던 내 귓가에 강단에서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은 교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중 무엇이 더 나은 평가방식인지에 대해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어제 발표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정기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달 간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무려 응답자의 89.4%가 긍정적인 응답을 보였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다른 기관의 여론조사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이 80% 가깝게 나왔다.정치는 기성복을 택하는 것이라는 항간의 주장을 살짝 뒤집어 보자면,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상당수의 시민들이 입을 수 있는 정치 기성복을 제공하고 있다.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이념과 성향을 가리지 않고 인간다운 사회를 열망하며 그를 위한 개혁에 동의하고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지난 5월 9일 저녁, 나는 지인과 함께 집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출구조사가 워낙 정확해졌기 때문에 8시 투표시간 마감과 함께 긴장은 곧바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방송사에서 들려주는 각종 출구조사 결과들을 놓고 이런저런 분석들을 교환했다. 그러다 문득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투표를 하기 전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내의 의견이 꽤 설득력이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 의견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몇 년 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 부부와 만난 자리였다. 선배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한 해가 끝나가고 있던 겨울이라 딸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 생활이 마무리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레 아이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선배 부부로부터 이런저런 경험담을 듣다 보니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과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 반에 아이들이 25명 정도라는 말에 집 근처 초등학교의 운동장 풍경이 절로 떠올랐다.집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두어 달 전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거실에 놓여 있는 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집 전화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놓아두고 있는 것은 단지 인터넷 회사에서 저렴하게 서비스해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십 년 동안 계속 같은 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집 전화에는 이따금씩 예상치 못한 인연들이 끊어진 줄을 다시 이어대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받으니 이름만 몇 번 들어보았던 친척 어르신께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계셨던 번호로 어머니를 찾으셨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집에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지난 구정 당일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차례 준비를 하다가 양초와 제사향이 모두 떨어졌음을 알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근 편의점들을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하의에 타이즈까지 껴입고 중무장을 한 채로 추운 새벽, 밖으로 나섰다. 명절 당일 그것도 어둠이 걷히지도 않은 새벽 시간에 과연 편의점들이 문을 열었을까 싶었지만, 집 앞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편의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운터에는 젊은 남성이 앉아 있었다. 혹시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난 다음 날이었던 10일 토요일, 나는 낮 12시가 다 돼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전날 밤에 어머니께서 급체를 하셔서 챙겨드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새벽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 뒤에 거실로 나가보니 전날 밤 어머니의 병세와 당장 나의 피곤함이 밤새도록 어우러진 탓인지 집안 가득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광화문에 나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