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 마이클 버드 《예수와 권세》 야다북스 ⓒ책짓는 아재

《예수와 권세》를 읽다.

기독교의 정치 참여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요즘이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다. 이 번역본이 출간되기 직전에 한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곧바로 탄핵안이 가결됐다. 골때리는 상황이 아닌가. 실로 ‘퍼킹 코리아, 어메이징 코리아’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적절한 기독교 “정치신학 입문서”(강영안)가 필요했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일단 짚어볼 부분은 《예수와 권세》가 두 명이 쓴 공저라는 점이다. 하지만 책표지에 보면 공저자 가운데 톰 라이트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크다. 그가 주저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유명세 덕분이기도 하다. 톰 라이트는 소위 말하는 새관점 학파의 대표주자이다. 성경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내세우는 일련의 흐름(new perspectives)의 선두에 서있는 이가 바로 그다. 공저자인 마이클 버드 또한 그 흐름에 속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지 대략적으로만 말해 보자. 개신교(protestant)는 중세 가톨릭 교회로부터 벗어날 때에, 구원관의 혁파가 그 저항(protest)의 방식이었다. 루터는 우리가 행함이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천명했다. 그가 부르짖은 이신칭의의 복음은 면죄부 장사를 떠받치던 가톨릭의 공로(merit) 사상을 전복한 동력이다. 새관점 학파는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이를 넘어서 더 포괄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사실 지금 논하는 관점은 톰 라이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새관점이다. 새관점의 대표 주자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너무 극명해 기존의 복음 해석(이신칭의)을 넘어선다는 점을 제외하면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심층적으로 파헤친다고 한들 기독교의 신학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리도 만무하다.)

루터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특정 명제에 초점을 맞춰서 복음을 해석한다. 반면 톰 라이트는 예수의 복음서 전체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예수의 모든 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그리고 물론 바울 또한 예수의 해석자이다). 복음서는 장르상 전기이고, 전기는 당연히 이야기, 즉 일련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명제가 사고를 전달하는 반면, 이야기는 인격체를 보여준다.

‘예수가 왕’이라는 명제의 현실적 의미

그러니 달리 말해서 새관점 학파의 접근은 특정 명제를 믿느냐를 넘어서 예수라는 인격체를 전인적으로 수용하느냐를 따져 묻는 것이다(이런 정리가 개신교를, 더 들어가면 루터파를 당황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큰 그림을 그리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자). 그러니 이 믿음은 인지적 수용이라기보다 전인적 충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예수가 왕이라는 테제로 복음을 확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권세》의 목표는 하나이다. 독재정권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공포와 분열의 시대에, 대학살과 위기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왕이시고, 예수의 나라는 여전히 교회가 증언하는 내용이자 사역의 목적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14쪽)

교회(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이러한 기독교 고유의 독특한 개념과 은유, 그리고 명제가 통용되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세상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중심으로 소통해야 한다. 교회가 기독교왕국(christendom)을 다시금 복원(미국)하거나 새롭게 건설(한국)하려고 하는 시도는 배제해야 맞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탐욕이다. 권력이라는 기반 위에서 교회를 증축하려는 시도는 곧 불신이다. 교회는 다른 기치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 원치 않는 백성에게 강압을 행사하여 예수를 왕으로 만들 책략을 꾸미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은 권력을 향해 진리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는지 지켜보면서 통치가 정의의 방향으로 휘어지게 하고, 통치 당국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임무를 이행하게 만들어야 한다.”(17쪽)

그렇다. 바로 정의이다. 구약의 모든 계명이 신을 사랑하고(경건), 이웃을 사랑하라(정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신에 대한 불경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폭력적 태도 모두에 대해 질책한다. 하지만 이방 족속들에게는 오직 이웃에 대한 태도만 문제 삼는다. 정의는 당대 이스라엘과 인근 이방 국가들에 동등하게 적용되는 기준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왕으로 인정한다면, 정의를 선택해야 한다. 예수를 따른다면, 정의로운 공동체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경건을 추구해야 맞다. 하지만 세상은 교회가 의로운가, 불의한가를 볼 것이다. 교회가 정의를 선택할 때, 세상이 존중할 것이다. 지금 세상이 존중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정의 대신에 힘을 추구해서다. 아마도 힘을 추구하는 교세의 감소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에 기인할 것이다. 그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으리라 본다.

교회 對 전체주의

계엄령 논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가 갈라지고, 마찬가지로 교회도 갈라졌다. 혹자의 눈에는 한국 교회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앞에 나와서 떠드는 이들이 기독교를 과잉대표한 탓도 크다. 여하간 계엄령 선포와 이에 대한 지지/반대는 우리에게 전체주의를 고민하게 만든다. 교회는 전체주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전체주의는 폭력으로 전횡하는 체제이다. 전체주의라는 폭력적 토양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압살한다.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민주주의가 선사하는 자유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지도 않으면 민주주의는 흔들린다. 민주주의는 무관심과 함께 위축될 수 있다. 시민들이 경계를 늦출 때 일이 터진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을 때 … 그러다 결국 너무 늦어버릴 때 민주주의는 죽는다.”(290쪽)

더욱이 교회 자신이 권력에 빌붙어서 “자기들이 믿는 형태의 기독교를 강요[…]할 가능성”(234쪽)도 있다. 책에서는 이를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명명했는데, 이의 “귀결은 진실한 신과 깊은 제자도가 아니라 피상적인 기독교이다.”(233쪽) 이런 사조가 표방하는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타종교인들의 입장에서 좋은 세상인지 생각해 보라. “기독교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려면,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234쪽)

이는 모두 전체주의적인 정신의 산물이다. 그리고 전체주의를 비판할 때, 극단적 우파(우익 기독교 포함)의 전횡만 생각하기 쉬운데 좌파 또한 문제이다. 특히 공저자 중 마이클 버드가 주목하는 바는 “연성 권위주의가 ‘진보’를 가장하고 서서히 꾸준히 침투하는 것이다.”(240쪽) 나는 가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여기서 진보는 좌파가 표방하는 가치이지 언제가 그들의 선택이 진보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파쇼와 동일한 태도로 전횡을 휘두른다(가령 ‘인권 마초’).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불의를 행한다.

“기억하자, 가장 큰 악을 저지르는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악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지나치게확신하는 이들이 뿜어내는 증오 앞에서 기도하고 항의하고 거룩한 저항을 펼쳐야 한다.”(257쪽)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

이 모든 서술은 지금 우리 현실이다. 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 이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인지적 태도를 뜻한다. 교회가 스스로 진리의 공동체라 믿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교회와 신자(교회 성원)은 유한하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교회와 신자들의 유한성을 뜻한다. 개인의 기질과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 젠더, 계층 등 여러 층위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진리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렇다. 교회는 진리를 믿는 공동체로서 마땅히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 특히 ‘복음’(기독교의 구원 진리의 핵심)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진리를 일상(가령 낙태)과 문화(가령 대중문화) 등 세상에 적용하는 데는 해석이 개입한다. 그 해석이 언제나 정확무오할 수는 없다. 특히 정치 영역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운다는 확신에 찬 태도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는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기여하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그 나라를 선취하며, 우리 공동체를 그 나라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만들어야 한다.”(305쪽)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그런데 우리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교회가 정치 영역에 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투사로 돌변한 모습을 보고 있다. 그건 오만이고 독단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과 –책을 통해서든, 얼굴을 보면서든- 대화해야 할 것이다. 공부하는 교회, 공부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국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너무 교회에만 뭐라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한국인은 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이건 상관 없이 대부분 제2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무종교인도 무종교적 입장 자체를 –열심의 정도는 다르지만- 일종의 종교라고 본다면). 다름 아닌 정치이다. 한국 사회 분열의 핵심에 이 문제가 놓여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와 권세》라는 정치신학 입문서를 살펴보는 맥락 하에서 말하자면, 교회는 오만을 버리고 겸손(공부, 대화)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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