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까지 자율 감축안 제출…설비 4분의 1 줄일 전망
전기료 인하·담합 예외 등 업계 핵심 요구 대부분 제외
“자율 구조조정 불가피했지만 늦어…소재산업 인식 부족”

단일규모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화학단지 '여수국가산단'. [사진출처=뉴시스]
단일규모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화학단지 '여수국가산단'. [사진=뉴시스]

【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정부가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 추진 방향을 제시했지만, 구체적 실행 방안이 빠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해 말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하고도 8개월 가까이 후속 조치를 내놓지 못한 끝에 마련된 이번 대책 역시 지원책이 미흡해 ‘반쪽 대책’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1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전날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 방향을 제시했다. 이번 방안은 과잉 설비 감축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10개 주요 석유화학 기업이 참여하는 자율 협약 형태로 진행된다.

연말까지 각 사는 구체적인 사업재편 계획을 제출해야 하며, 이를 통해 약 270만~370만t 규모의 NCC 감축이 예상된다. 이는 대형 NCC 3기를 줄이는 수준으로, 여수·대산·울산 등 3대 산단에서 각각 한 기씩 줄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는 구체적인 감축 방식과 이행 시기를 기업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이는 IMF 사태 당시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기업을 묶어 대규모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번 구조개편은 정부가 직접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스스로 자구안을 마련하도록 유도하는 방향에 방점이 찍혔다.

구체적인 지원책은 연말 이후로 미뤄졌다. 기업들이 제출한 사업재편 계획의 타당성과 자구 노력 수준을 평가한 뒤, 금융·세제·연구개발(R&D)·규제 완화 등 지원 방안을 차등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기업별 자구노력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으면 지원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지원은 ‘조건부’ 성격을 띠게 된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업계가 뼈를 깎는 각오로 사업재편에 나서준다면 정부도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겠다”며 “앞으로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수시로 개최해 사업재편 진행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적기에 마련하고 시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업계에서 요구해온 지원책은 이번 방안에는 대부분 반영되지 않았다. 석유화학단지가 몰린 지역을 대상으로 한 전기요금 인하, 공정거래법상 담합 예외 인정 등은 현장의 핵심 요구였지만 빠졌다. 업계에서는 제도적 유연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구조조정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어렵다는 시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방식은 업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며 “각 사의 이해관계가 달라 의견차이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업계 내부 사정은 훨씬 복잡하다. 석유화학산업은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 유분을 생산하는 업스트림 부문과, 이를 다시 가공해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합성고무 등 최종 제품을 만드는 다운스트림 부문으로 구성된다. 기업마다 NCC 의존도, 정유사 보유 여부, 자금 여력 등이 달라 구조조정의 충격과 부담도 기업별로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유사와 석화업체 간 수직 통합 ▲업체 간 NCC 공동 운영 ▲개별 설비 폐쇄 등이 구조 개편 시나리오로 거론되지만, 어느 기업이 먼저 감축을 떠안을지에 대한 이해관계 조정은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구조개편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부 책임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석유화학산업은 기업 수가 많고 업종도 다양해 일방적인 구조조정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그동안 정부가 공정거래법 규제를 풀지 않은 채 뚜렷한 산업 정책 방향도 제시하지 않아 업계가 선제적으로 대응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산업 정책의 큰 그림을 제시하지 않고 공정거래법 규제를 그대로 두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서둘러 움직일 수는 없었다”며 “정부가 방향을 잡아주지 않은 채 뒤늦게 책임만 업계에 넘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무엇보다 소재산업이 국가 산업경쟁력의 핵심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전략적으로 인식하고 중장기적 청사진을 마련해왔는지 의문”이라며 “지금까지의 정책 흐름만 보면 소재산업을 어떻게 키우고 보호할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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