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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비어봄의  <행복한 위선자>. 도서출판 사자와어린양. [사진=책짓는 아재]

<행복한 위선자>를 읽다.

<행복한 위선자>는 20세기 전반 영국에서 유머 작가로 유명했던 맥스 비어봄이 집필한 동화이다. 순수한 본문은 100여 쪽이 되지 않을 만큼 짧지만(조지 셰링엄의 그림이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고, 뒷부분에 실린 부록들도 유용하다) 재밌다.

조지 헬에서 조지 헤븐으로

줄거리는 단순하다. 조지 헬이라는 사악하고 방탕한 귀족이 있다. 거리에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피할 정도이다. 그런데 가난한 처녀 제니 미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가 성자 같은 외모를 선호하는 얼빠라서다.

이에 조지는 성자의 가면을 구해서 얼굴에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다가간다(그 가면은 진짜 얼굴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지만, 표정을 바꿀 수 없다). 그녀에게 새롭게 청혼하자,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인 동의를 얻는다.

이제 그는 이름을 조지 헬에서 조지 헤븐으로 바꾸고, 그의 재산도 자기 때문에 가난해진 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그녀와 더불어 소박한 시골 생활을 살아간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성자처럼 살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질투에 사로잡힌 그의 옛 여친 감보기가 그의 가면을 벗겨버린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의 얼굴은 가면과 동일하게 변해있었다. 더욱이 가면이 아니라 그의 진짜 얼굴이라서 이제 웃는 표정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하면 참 재미없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신화와 현실이 중첩된 몽환적 세계관 속에서 구현되는 신비롭고 낭만적인 서사가 페이지를 뚫고 나온다. 결코 밋밋한 요약으로는 담을 수 없는 생기가 페이지마다 넘쳐흐른다.

아무리 봐도 <행복한 위선자>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또 다른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왕자>가 마음의 눈이 굳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듯이 <행복한 위선자>는 삶과 인격의 변화를 포기한 이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과 유사한 측면도 있다. 이 단편의 주인공 어니스트는 매일 거대한 바위산을 바라보며 꾸준히 마음에 새기다가 어느샌가 그 바위산의 큰 바위 얼굴과 비슷하게 되었다.

어니스트는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계속 보며 자신을 성찰한 반면, 조지는 자기 얼굴에 쓴 가면에 부합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둘 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외모가 변했다. 다만 조지와 다르게 어니스트는 자신의 그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그의 겸손을 보여준다).

인간 변화의 비결

이런 다양한 동화나 소설들은 우리에게 내면을 성찰하고 외면을 변화할 수 있는 자극을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행복한 위선자>는 로렌스 앤더슨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다. 좋은 선택은 좋은 성격에서 나오고, 몇 개의 좋은 선택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우리의 변화는 우리 자신이 수행한 일련의 선택에 따른 결과(의 총합)라는 뜻이다. 역자 후기에 보면,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C. S. 루이스와 언론인이자 소설가 G. K. 체스터튼의 통찰을 빌려 인간은 자신이 가장했던 대로 변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쁜 짓을 따라 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선하게 되는 비결도 가장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전혀 아니다. 단지 내가 보기에 <행복한 위선자>가 보여주는 삶의 변화를 위한 또 다른 비결이 하나 있다. 실은 이쪽이 더 본질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이 동화의 저자 맥스 비어봄은 동력을 사랑에서 찾는다. 조지가 성자의 가면을 쓴 이유는 제니 미어가 성자의 외모를 원해서다. 그는 그녀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여기서 조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니 미어의 외모중심주의를 비판한다면, 맥락을 놓치게 된다. 핵심은 그녀의 욕망(사랑)에 맞추어 자신을 적극적으로 바꾸어갔다는 데에 있다. 그녀는 훈남의 외모가 아니라 성자의 외모를 욕망했다. 이는 선(善)을 향한 그녀의 갈망을 보여준다.

조지는 헨리 미어의 갈망을 갈망했다. 이는 곧 그녀가 추구한 선을 그 또한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가 가장했던 대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의 동력은 바로 그녀의 욕망에 부응하고자 하는 사랑에서 발견된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변화는 내가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삶은 내가 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다섯 명의 평균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꼭 5명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내가 누군가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이유는 그를 애정하기 때문이 아닌가(동성의 우정이든, 이성의 사랑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의 사랑이든 간에 다르지 않다). 이건 물리적 공간에서의 친교가 아니라 SNS와 같은 가상적 공간에서의 교제라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오마에 겐이치도 삶을 바꾸려면, 시간을 달리 쓰고 사는 곳을 옮기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건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주는 만큼 나는 그의 영향을 받게 된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조지 헬은 그의 여친 감보기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감보기는 조지 못잖게 악한 여인이다. 조지 헤븐은 그의 아내 제니 미어와 결혼 후 매일 매순간을 같이 보냈다. 제니 미어는 그를 감화시킬 만큼 선량한 여인이다.

<행복한 위선자>는 어려운 작품이 아니다. 내가 역자와 엄청나게 대립하거나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입장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한대로 된다는 역자의 주장 자체에도 동의한다. 단지 내 눈에 들어온 부분이 바로 우리는 가장 많이 만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며, 우리 자신을 바꾸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로 만나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을 뿐이다.

맥스 비어봄의 동화는 쉽고 재밌게 읽히지만, 곱씹어볼수록 심오하기 그지없는 작품이다. 과연 조지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는지 잘 생각해 보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소품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강하다. 재밌지만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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