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번 회차 칼럼을 시작하기 전에 전제할 것이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보수’ 정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의미하고, ‘진보’정당은 ‘진보당’, ‘사회민주당’을 비롯해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그 정당들이다. 보통 여당인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을 보수정당, 민주당을 진보개혁 정당으로 분류하거나 각 당 소속 정치인들이 그렇게 자처하는데, 이 분류는 잘못됐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수구·극우에 가깝고,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보수로 분류돼야 맞다.
지난 10월 31일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국민의힘 공천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될 만한 녹취를 공개했다. 이후 대통령실을 대상으로 한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각종 비위 의혹이 사실이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제공하는 각종 증거가 드러났다. 이후 대통령의 지지율은 20% 미만으로 내려갔다, 대통령은 11월 7일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을 열었다. 많은 시사평론가들은 이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이 내용 없이 시민들의 분노만 돋울 것이라고 예상했고 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민주당을 필두로 야당들은 윤 대통령과 그 일가의 범법을 폭로하고 대통령 퇴진 요구를 위한 스크럼을 짜고 있다.
지난 회차 칼럼을 쓸 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민주당이 무능하게 질질 끌려다니고, 그 외의 정당이 선두에 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의 모습은 민주당이 선두에서 전략적으로 잘 싸우는 형세다. 물론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한 사람은 민주당에 녹취를 제공한 공익제보자다. 그러나 아무리 공익제보자가 용기 있게 제보했어도, 제보받은 측이 지혜롭게 제보를 다루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민주당은 제공받은 제보를 법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하나씩 공개하고 있다. 또한 ‘국정감사’라는 국회의 시간표에 맞추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대방에게 무슨 무기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공격을 받은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그리고 국민의힘 내부 분열도 일어나고 있다.
다시 역사 속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들을 살펴보자. 이승만, 박정희 정권 당시는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야당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국회의원은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인 헌병을 동원해 국회의원을 통근버스째 연행해 독재를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킨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암살이나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조봉암 선생은 사법살인 당했다. 박정희 정권 때도 비슷했다. 3선개헌 당시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김영삼 당시 국회의원은 출근길에 초산으로 테러를 당했고, 유신개헌 이후 신민당 총재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에서 제명당했다. 국회의원은 아니었지만 재야의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서 바다에 수장될 뻔했다. 박정희 정권과 여당이 3선개헌을 밀어붙였을 때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유진오 총재의 주도로 개헌안에 찬성한 신민당 국회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당을 해산시켰다. 당을 해산시킬 정도의 저항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야당과 야당 정치인을 향한 탄압은 시민들의 분노를 끌어냈고, 4·19혁명과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박근혜 대통령 당시는 1987년 민주화 개헌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나 당을 해산할 정도의 상황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당이지만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던 야당으로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키기까지 많은 정치적 시도와 다른 야당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민주당은 제1야당의 입장에서 ‘탄핵’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탄핵에 앞장서지 않았다. 결국 주말마다 엄동설한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난 후에야 탄핵안을 발의했다.
여기에서 잠깐 야당이 먼저 탄핵에 나섰던 사례를 살펴보자. 바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발의였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소수였던 상황에서 야당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 같은 계열이었던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을 발의했고, 본회의장에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끝에 탄핵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시민들은 탄핵안에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나섰다. 이후의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참패하는 결과를 받아들인 후에 탄핵안은 기각됐다. 이후 야당 입장에서 대통령 탄핵은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할 사안이 되었다.
정리하면 독재정권 당시 독재자의 임기를 단축하기 전까지 야당은 모진 탄압과 신변의 위협을 감내해야 했고, 야당의 유력 정치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탄압을 받았다. 탄압받는 야당과 유력 정치인의 모습은 시민들의 분노와 궐기를 이끌어 냈다. 반면 1987년 민주화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시민들의 요구에 야당이 끌려가는 형태였다. 여기에는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총선에서 참패한 것이 본보기가 됐을 수도 있다.
현재로 돌아와 보자. 야당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의 모습이 섞여 있는 양상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혹자는 ‘사법리스크’라고 부르고, 혹자는 검찰 권력을 이용한 야당 탄압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모진 수난을 겪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야당 유력 정치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11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 이후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 열렸던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와 최고위원들의 인터뷰에서 ‘탄핵’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저 “국민의 요구”,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는 말만 나왔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 전 주말에 있었던 민주당이 주최한 집회에 10-30만의 시민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와 비슷하다.
민주당은 여전히 ‘탄핵’을 먼저 입에 올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지금까지 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박근혜 탄핵 정국 때보다 훨씬 치밀하다. 과반수 의석을 바탕으로 국회의원의 권한과 국회의 일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제보 공개와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이러한 면모를 잘 드러냈다. 그리고 이는 시민들의 시위 참여를 만들어 냈다. 제1 야당과 시민 사이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입장에서 민주당이 공개할 녹취가 더 남아 있는 것,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공포스러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구체적인 대통령 진퇴 여부를 요구할 수 있는 정당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등이다. 우선 이들 정당은 민주당에 비해 운신의 폭이 훨씬 넓다. 그러므로 이들 정당이 시민들의 요구를 받들어서 민주당을 압박하는 정국을 형성할 수 있다면 이들은 시민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고, 민주당 입장에선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민들이 조국혁신당에 표를 준 이유는 조국혁신당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쇄빙선이 되겠다는 비전 때문이었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약간 삐끗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현 시국에서 지난 총선 때의 비전을 현실로 보여준다면, 향후 조국혁신당의 발언권이 더 늘어날 것이다. 진보당, 사회민주당은 자기 정당의 정강정책을 감안하면 역시 대통령 퇴진에 관한 구체적인 요구를 드러낼 수 있다.
대통령이건, 정당이건, 정치인이건, 그리고 시민이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주체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소멸할 것이다. 역사를 잘 복기하여 교훈을 얻어내고, 현재 상황에 맞게 그 교훈을 적용하는 주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혁신당은 우선 당내 상황이나 잘 정리하길 바란다. 그것이 정리된 이후에는 ‘국민의힘 재접수’를 목표로 삼지 말고, 새로운 보수의 기치를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지지자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고, “풍찬노숙”을 각오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수구’나 ‘극우’가 아닌 제대로 된 보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세대, 성별, 장애-비장애 여부에 따른 갈라치기가 아닌 정치적 비전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또한 이전 지면에서 국민의힘에 던진 제안과 마찬가지로 개혁신당 역시 사실에 기반한 제대로 된 역사관을 보여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