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한국사에서 역대 왕 가운데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연산군 재위 기간 중 엄청난 살육이 발생했다. 흔히 조선의 4대사화라고 평가받는 선비와 신하에 대한 대규모 숙청 가운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연산군 재위 기간에 일어났다. 연산군이 대규모 사화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왕권과 왕권을 견제할 신하들의 권력 사이의 대립 과정에서 연산군이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행사를 꿈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두 차례의 사화에서 가장 많이 숙청당한 사람은 당시 왕권의 견제를 담당했던 삼사(三司)의 신하들, 그리고 오랫동안 왕권 근처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훈구(勳舊) 세력에 대항했던 사림(士林)들이었다.

연산군이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또 다른 이유는 연산군이 여색(女色)을 심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끔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쓰는데,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연산군과 잠자리를 함께 할 여인들을 모으는 ‘흥청사’라는 임시 관청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정사(正史)인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기록돼 있는 연산군의 성적 탐닉은 다음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왕의 음탕함이 날로 심하여, 매본 족친과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연산군일기』)

위의 기록을 보면 연산군의 성적 집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족친이면 자신의 친척 관계이고, 선왕의 후궁이면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장녹수도 등장한다. 참고로 장녹수는 기혼자나 마찬가지였고, 기생 혹은 관노비 출신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연산군이 장녹수 자체도 매우 아꼈는데, 여기에 다른 여성, 심지어 자신과 가족 관계이거나 신하들의 처첩까지 겁탈한 것이다. 참고로 연산군의 애첩인 장녹수가 연산군을 쥐고 흔들면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고 연산군 폐위 이후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이종우, 「비선실세 장녹수(張綠水)」, 『투데이신문』, 2016년 10월 26일자 참조.)

이러한 폭군의 이미지를 가진 연산군이지만, 나름 의외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연산군은 조선조에서 보기 힘든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가장 큰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적장자 원칙’이 있었다. 이것은 왕실의 정통성을 비롯해, 책봉(冊封) 체제를 통한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던 조선의 시스템을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제 조선의 26명의 왕(참고로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대한제국의 황제가 됐고, 다음 황제인 순종도 마찬가지였다.) 가운데 큰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서 적장자 원칙에 딱 맞는 왕자였다. 특히 연산군은 조선 왕조 당시 최초로 궁궐에서 태어난 적장자였다. 심지어 신하들이 연산군이 탄생했을 때 궁궐에서 태어난 최초의 적장자라는 이유로 성종에게 경하의 인사를 올릴 정도였다. 참고로 연산군의 확고한 정통성 때문에 아버지인 성종(成宗, 1457~1494)은 연산군을 매우 아꼈는데, 성종 역시 대표적인 호색한(好色漢)으로 꼽혀서 연산군의 성적 탐닉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또한 연산군은 즉위 초중반까지는 매우 정상적이다 못해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즉위 초 세금 제도와 궁궐 정비를 통해 사치 풍조를 줄였고, 세 명의 대비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의 모습도 보였다. 조선이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음을 감안했을 때 효자로서의 면모와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여진족과 왜구에 대한 견제와 격퇴를 적절히 시행해 외교적인 능력도 보였다. 흔히 연산군의 폭정 중 하나로 신하들과 모여서 함께 성리학 경전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행사인 ‘경연(經筵)의 폐지’를 꼽는데, 조선의 왕 가운데 경연을 좋아하는 왕은 몇 명 없었다. 성군으로 꼽히는 왕들도 경연에 빠짐없이 참여한 왕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생각보다 애처가였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연산군의 성적 탐닉에 관한 기록이 수없이 많이 등장하지만, 연산군은 중전인 신씨(申氏)를 매우 아꼈다. 중전 신씨가 성종의 무덤에 친히 참배하고 돌아왔을 때 연산군이 친히 맞이했다는 기록도 존재할 정도다. 특히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이 칼을 들고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 찾아가서 당장 나오라는 패륜적 행위를 저질렀는데, 당시 중전 신씨가 연산군을 말려서 자순대비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을 거스른 사람 가운데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중전 신씨가 유일했다. 연산군과 중전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연년생으로 8명이었다. 그러나 연산군과 후궁‘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5남 7녀였다. 연산군의 성적 탐닉을 감안하면 후궁을 비롯해 연산군과 잠자리를 가진 여성이 한두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전 신씨에게서 태어난 자손이 그 외의 후궁들 사이에 나온 자손보다 고작 4명 적을 뿐이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각각 다른 곳으로 유배 보내졌다. 그런데 이때 중전 신씨가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전해진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연산군 사망 당시 연산군을 감시하던 신하들이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할 때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몇 없는 적장자로서의 적통성과 영민함으로 큰 기대를 받던 왕자였다. 재위 초중반까지는 훌륭한 왕의 모습을 보였으나,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을 휘두르기 위해 견제의 역할을 담당하던 신하들과 연산군의 측근인 훈구세력과 대립했던 사림들을 대규모로 숙청했다. 또한 패륜적 행동과 극단적인 성적 탐닉을 보여줬지만, 중전 신씨에게는 엄청난 애처가였다.

연산군에게 좋은 모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위 중후반에 보여준 광적인 모습으로 인해 ‘폭군’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인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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