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다시 읽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여전히 흥미롭다. 그의 다른 저작들, 가령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논지는 낯설고 기이하지만, 설득력 있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물론 책 제목만 놓고 보면, 참으로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테크닉을 소개하는 것으로 들린다. 하나 실상은 비윤리적이기는커녕 무척이나 올바르다(그래서 설득력이 있는 거다). 또한 간단하다. 그냥 공부하면 된다. 밥 로스 아저씨의 진부한 멘트, “참 쉽죠?”처럼 들린다는 걸 안다. 그러나 결코 무책임한 소리는 아니다. 아무 거나 공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 책이 놓인 맥락에 대한 지식을 익히라는 거다. 읽지 않은 책을 말하고 싶다면,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분야에 대해서 카페나 술집에서 편하게 떠들어댈 정도는 읽고 들어야 한다. 당연히 아는 게 많을수록 좋다. 그만큼 통찰력이 커진다.

가령 기예르모 델 토로의 뱀파이어 3부작에 대한 이런 평가를 생각해보라. “스트레인 3부작만이 앤 라이스가 쓴 뱀파이어 소설들의 진정한 계승자 자격이 있다.” 앤 라이스에 대해 어느 정도, 그녀가 쓴 뱀파이어 연대기 시리즈를 조금이라도 보아야 감이 잡힐 것이다.

가끔 찾아뵙는 출판계의 한 어른이 생각난다. 이분은 열심히 서평을 써서 공개하신다. 그런데 이분이 서평을 쓴 책을 완독한 경우는 많지 않다. 놀랍지만, 이해가 된다. 출판인으로서 특정한 책에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무를 수가 없다. 그러나 평생 접한 방대한 저작 때문에 어느 책을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읽은 책을 정리한 데이터베이스가 어마어마하다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도 그런 것 같다. 출판계의 수렁에 발을 담근 이래로 나 자신의 독서도 그렇게 변해갔다. 부분만 읽는 독서가 얼마나 많아졌던가. 하지만 눈도장 찍은 원고를 쌓으면 태산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싫어하던 넓고 얕게 아는 지식이 바로 내 이야기 아닌가.

무엇보다도 기획이라는 과업이 편집자들의 내공, 즉 너른 시야를 강제한다. 출판 기획을 위해서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정독하기보다 대체로 수많은 책들을 후루룩 넘겨가며 살펴보게 마련이다. 절로 시야가 늘어난다. 독서를 통한 지식의 폭이 확대되는 만큼 내가 제출한 기획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증가된다.

<strong>바벨 도서관의 사서</strong><br>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br>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br>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br>나 역시 마찬가지다. <br>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br>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좋은 기획자의 조건은 좋은 평론가와 좋은 연구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각각의 영역에서 요구되는 지식의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그 분야에 등장한 새로운 작품이나 논문에 대해서 자신의 넓은 식견 위에 얹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된다. 기존에 축적된 전통들과 연결(혹은 분리)시켜주는 것이 바로 기획의 내공이자 평론의 핵심, 그리고 연구의 근간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출판 기획자도 대체로 자기 전문 분야가 있다. 모든 분야에 정통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나와바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편집자들이 때가 차매 독립한다. 자기 출판사 만들어서 내는 책들의 목록을 보면, 그 편집자가 어느 분야에서 내공을 축적해왔는지가 드러난다(물론 그 분야의 인맥도 포함된다).

내 전문 영역은 어디인가? 지난 20여 년간 넓고 옅게 지식을 쌓아왔지만, 그래도 나름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주제들은 있다. 이제 다시 목록을 가다듬어 본다. 오랜 품격을 지닌 인문고전에서 지금 트렌디한 장르소설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에 내 나름의 인덱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 이제 슬슬 출사표를 던져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먼저 우리 집안 기획재정부 장관님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연히 각오를 다지는 중 갑자기 한기가 돈다. 안 되겠다. 겉옷을 챙겨 입어야겠다. 그래, 가늘고 길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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