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회차에서 재해위가 시련을 겪으면서 원주지역의 각종 사업이 원주교구 신부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각종 사업 주체가 바뀌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것은 바로 외국으로부터의 자금지원이 변화했던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 올림픽 유치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사개위는 외부 지원기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예로 세베모(Cebemo)에 신청한 1983년도 농촌소비조합육성계속사업의 승인도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984년 말 세베모에 신청한 후속 신규사업의 승인 여부가 1985년 말까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업 주체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후반 세베모에 신청했던 신규 사업들이 승인되고 유기농업운동에 기반한 농산물직거래, 직판사업 등이 미제레오 등의 대규모 자금 지원에 따라 연이어 추진됐다.1)
그리고 20년간의 재해복구사업에 이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한살림운동”이었다. 원주교구는 1986년 12월 박재일이 주도한 서울 “한살림농산”의 출범, 1988년 4월 21일 “한살림소비조합”의 창립, 1989년 11월 “한살림모임”의 창립, 1989년 “한살림선언” 등을 사회개발부를 통해 지원했다. 사회개발부의 출범으로 원주그룹은 원주교구에서의 활동에서 물러났고, 1980년대 중후반 원주소비조합과 “한살림농산”의 창립, “한살림모임”의 구성과 활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2) 당초 원주그룹 역시 원주교구와 함께 “한살림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깊이 개입했지만, 한살림 사업에 원주그룹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원주교구가 사회개발부를 통해 적극 지원했다.
“한살림운동”은 생명에 관한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1980년대 초부터 원주그룹은 내부적으로 이전 활동에 기반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평가와 향후 대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82년 초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을 내놓았다. 이 문건은 1970년대 후반 원주지역의 반독재투쟁과 부락개발운동에 기반한 협동조합운동의 추진 속에서 부딪치는 제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를 모색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1970년 초 태동 당시, 민중의 생존권 실현에 한정됐던 ‘생명’에 관한 문제의식, 1970년대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최시형의 동학사상 등에 대한 재해석과정을 거쳐 ‘사람’에서 ‘자연’과 ‘사물’의 영역으로 그 사상과 운동의 인식범위가 확장돼 나타난 것이었다. 이 문건은 장일순이 1940년대부터 섭렵하고 내면화했던 유불선사상과 동학사상, 간디의 사상, 그리고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 등에서 보여주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정서적·문화적 수준의 인식이 일정하게 체계화된 것이었다. 아울러 원주그룹 형성 이후 주로 마르크시즘의 패러다임과 근대적 조합주의에 기반해 반독재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에서 동학사상 등에 기반한 탈근대적 사고 및 인식 속에서 생명운동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는 “한살림운동”의 태동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79년 3월, 지학순 주교는 네덜란드 가톨릭의 해외지원 단체인 세베모(Cebemo)에 직접 방문해서 자금 지원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시작된 세베모의 지원은 수 차례의 사업 계획 수정을 거쳐서 “한살림운동”의 자금지원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세베모의 자금 지원을 통해서 협동조합 운동이 발달한 일본의 협동조합을 시찰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 시찰에는 가톨릭농민회와 원주교구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학순 주교가 가톨릭농민회와 원주교구 농민들의 참여를 유도했을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울러, 지학순주교는 서울지역 성당에서의 특별강론과 강의를 통해서 “한살림농산” 창립 초기 도농직거래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서 지학순주교와 최기식 신부, 장일순 등은 도농직거래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파했고, 그 결과 “한살림운동”은 점차 확산될 수 있었다.4)
“한살림운동”은 1970년대 후반 엄혹했던 정치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이로 인한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을 정치 투쟁에서 생명 운동과 협동 운동으로 변환한 사건이었다. 아울러 지학순 주교가 민주화 운동가인 동시에, 성직자로서 생명과 자립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가졌음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다양한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한살림”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이어지고 있는“한살림운동”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협동조합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7쪽.
2)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7-348쪽.
3)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8쪽.
4)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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