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신선하다. 흔치 않은 공연, 그래서 더 매력 있다.
라이선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한국 초연이 연일 뜨거운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개막 소식이 들려온 후로 가장 시선을 끌었던 뮤지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2020년 9월에 첫선을 보이려던 작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개막을 연기해야만 했고,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은 2021년 3월이 돼서야 비로소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무사히 궤도에 올라 반가운 개막 소식을 전한 ‘그레이트 코멧’은 오는 5월 30일까지 서울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상연될 예정이다.
‘위대한 혜성’을 뜻하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러시아 대표 작가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의 대하소설 ‘전쟁과 평화’ 중 제2권 5부를 각색해 제작됐다. 70여 쪽 분량엔 볼콘스키 가와 베주호프 가, 로스토프 가, 쿠라긴 가까지 총 4개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겪은 에피소드가 세밀한 묘사와 함께 담겨있다.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며 느낀 전쟁의 어두운 이면과 불안정했던 사회상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냈고, 인간 경험의 본질과 삶의 의미에도 주목했다. 또 다른 대표작인 ‘안나 카레니나’, ‘부활’처럼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써온 그답게 이 작품에도 역시 시대상을 반영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에도 이런 흐름이 유사하게 나타난다. 뮤지컬은 원작이 가진 어감이나 느낌을 최대한 살리되, 형식적인 측면에서만큼은 파격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든 관계 속에서 느낀 감정, 극적인 심리 변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러시아 문학 특징답게 인물 이름부터 쉽지 않다. 원작을 꼭 미리 봐야만 할 필요는 없지만,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모르고 본다면 이해가 조금 더딜 수도 있다. 만일 2016년 작 영국 BBC 드라마 ‘전쟁과 평화’를 시청했던 관객이라면 전개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프롤로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계, 성격 묘사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작품에 더욱더 빠르게 몰입하기 위해서는 이때 꼭 집중해서 들어봐야 한다. 관람 전 공연장 내부에 마련된 가족 관계도와 캐스팅 보드를 같이 살펴봐 두는 것도 좋다.
뮤지컬 원제는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Natasha, Pierre & The Great Comet of 1812)’으로, 피에르와 나타샤가 작품의 축을 이룬다. 우선 주인공으로서 전반적인 상황을 관망하는 관찰자이기도 한 피에르는 자신의 부인인 엘렌이 부정한 여인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체념한 채 살아가는 소심한 남자다. 실패한 결혼, 무기력한 일상이 그를 반복된 분노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부유한 가문의 서자로 태어난 덕분에 아쉬움 없이 살았으나 마음은 늘 공허했다. 그래도 모두 그를 성실하고 믿음직한 인물이라 여겨, 필요할 때마다 피에르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조언을 구한다. 반면 젊고 아름다운 여인 나타샤는 자신의 인생을 써 내려가는 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어린 나이에 가문의 부와 명예를 위한 약혼을 했지만, 우연히 매력적인 장교 아나톨과 만난 뒤 혼란에 빠진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순간적인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향하는 모습은 피에르와 사뭇 다르게 보인다. 이 두 사람은 다른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아가면서 일련의 계기를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방황의 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순간, 피에르의 마음을 관통해 하늘로 가로지른 혜성은 찬란한 빛을 내며 마음속 어둠을 밝힌다. 혜성이 그린 궤적을 찬찬히 따르다 보면 그들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이때, 홀로 선 피에르의 벅찬 뒷모습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시작과 동시에 쉴새 없이 몰아친 전개는 성스루 뮤지컬이란 작품의 성격과도 잘 어우러진다. 우선 음악 분위기부터 확실히 다르다. 극작가 겸 작곡가 데이브 말로이의 표현대로 ‘일렉트로 팝 오페라’답게 전반적으로 다채롭고 새롭다. 다양한 장르 음악이 한데 모인 27가지 넘버들은 어디서도 쉽게 접하지 못할 만큼 색다르고 풍성한 무대를 탄생시켰다. 여기에 피아노, 바이올린, 아코디언 등 배우들이 펼친 즉흥 연주가 더해지면서 낯설지만 묘한 끌림을 선사한다. 특히 모두 한데 어우러져 펼친 ‘The Abduction’은 흥겨운 리듬에 소소한 웃음까지 선물한다.
작품을 또 한 번 특별하게 만든 무대 디자인에도 주목해 볼 만 하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꾸며진 무대는 내면에 잠재한 시대의 낭만을 그렸다. 또 곳곳에 밝혀진 샹들리에가 화려하면서도 흥겨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치 파티장처럼 꾸며진 무대구성은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핵심 요소다. 잘 보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원형의 무대가 마치 각각 회전운동을 하는 하나의 행성과도 닮은 느낌이 든다. 배우들은 이 무대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각자 준비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때때로 객석 통로로 달려와 단숨에 몰입감을 높인다.
좌석 역시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에 알맞게 일반적인 뮤지컬 무대와 다르게 배치됐다. 무대 전면을 바라보는 좌석 외에 무대 가까이 각 구역으로 나뉜 코멧석이 따로 마련돼 있는 점도 독특하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따르긴 하겠지만, 객석 바로 앞에서 노래하고 호흡하는 배우들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흔치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무대와 객석 간 경계의 허물어짐이 만들어 낸 결과 덕분에 낯설었던 관객들은 화려한 쇼의 일부가 되어 자연스레 한데 어우러진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크리에이터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마지막으로 이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선보인 배우들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피에르 역을 맡은 홍광호는 감출 수 없는 존재감으로 내내 시선을 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커다란 감동을 노래한다. 이해나 역시 여리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을 지닌 나타샤를 입체적으로 잘 표현했다. 또 그런 나타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아나톨 역 박강현은 평소 신사다운 이미지와 달리 ‘나쁜 남자’ 역할을 자연스럽게 선보이며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비슷한 형식의 공연이었던 ‘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이번 ‘그레이트 코멧’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홍륜희의 무대 또한 인상 깊었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속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그들의 모습에서 그다지 멀지만은 않은 일상을 찾는다. 무한을 끝없이 떠돌던 주인공은 누군가가 뿜어낸 빛으로 인해 다행히 새 희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의미 없이 침전하던 삶이 또 다른 의미를 찾게 되면서 멈춰있던 심장도 충분히 다시 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막연한 미래가 설렘으로 바뀌는 경험이 꽤 짜릿하다.
혁신을 상징하는 작품은 이렇게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1812년 하늘을 밝혔던 거대 혜성처럼, 앞으로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이 남길 빛의 흔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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